gureum 둔주 2020. 2. 1. 16:59
1968년 8월 지원동 채석장에서 주운 돌



고향집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거처를 옮겨 다닌 횟수를 헤아려보니 총 열아홉 번이다. 사는 동안 어느새 살림살이가 많아져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은 늘어만 갔다.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필요 없거나 오래된 물건, 또는 취미로 모은 기호품들은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이사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취미로 모은 물건이나 추억이 묻은 물건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오래된 책들도 버려야 했다. 학창 시절의 상장과 통신표도 언제였는지 모르게 지금은 없다. 고향집에 있었는데, 집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열아홉 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려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물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돌이다. 이 돌이 내 수중에 들어온 그날은 벌써 50년도 넘었다. 이 돌은 버려진 듯 눈길을 받지 못한 채 집의 거실 화분에 올려져 있다. 작은 도시락 정도의 크기에 사다리꼴 비슷한 모양의 이 돌은 땅속 깊은 암반이 깨지면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다. 비바람에 씻긴 풍화의 세월을 겪지 않은 돌이다. 겉은 거칠고 벌집 같은 구멍들이 있다. 아주 작은 구멍이다. 멜론 껍질의 거친 무늬와 비슷하다. 구멍에는 돌기둥 모양의 돌기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마치 복어의 하얀 배에 붙은 껄끄러운 가시 같다. 햇살이 비켜 비추이면 반짝이기도 한다. 그러나 특별히 귀한 돌이거나, 수석 수집가들의 눈길을 끌만한 돌은 아니다.
나는 이 돌을 좌대를 만들어 진열장에 고이 놓아두지도 않았다. 이사를 다닐 때 특별히 챙겨 가져온 것도 아니다. 기르는 소사나무 분재 화분에 올려져 있다거나, 금붕어 어항 속에 들어있어서 버려지지 않고 이삿짐에 묻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 가장 오래된 추억의 물건이 되어 지금도 소사분재 화분 위에 방치된 듯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8월 어느 날 뙤약볕 쏟아지던 뜨거운 오후, 친구 재근과 나는 답답한 학동의 자취방을 나왔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무작정 걷다 보니 도시를 벗어나 지원동 골짜기까지 갔다. 지금은 화순 너릿재 바로 밑까지 아파트들이 들어차 도시화 되었지만, 그 시절 지원동은 전형적인 시골 농촌이었다.
무등산 2수원지 쪽에서 흘러내린 골짜기 물을 건너 밭에 원두막이 있었다. 밭에는 수박과 참외가 잎사귀 사이로 주렁주렁 탐스러웠다. 원두막에는 농부 아저씨가 부채를 흔들며 한가로이 앉아있었다. 우리는 침만 삼키며 원두막을 지나야 했다.
골짜기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산허리를 자른 절개지의 암반을 깨는 채석장이 있었다. 바위절벽은 깨어진 돌덩이들의 풍화되지 않은 맨살에 한여름 오후의 뜨거운 햇살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화약 냄새가 은근했다. 가까이 갔더니 작은 돌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수만 년간 비바람 한 번 맞지 않고 햇살 한 번 받지 않은 채 땅속 깊이 묻혀있던 암반층의 속살이 파편으로 부서져 눈부신 햇살의 뜨거운 열을 복사하고 있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하얀 돌조각이 있었다. 손에 들어 살펴보니 복어의 뱃살에 박힌 돌기 같은 수정들이 작은 구멍 사이에 붙어 햇살에 반짝였다. 그 돌을 채석장 아저씨께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골짜기에서 번갈아 등목을 하고 긴 여름해가 넘어갈 즈음에야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돌도 가지고 왔다. 그날 이후 그 돌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귀함 받지도 못하면서, 아직까지 내 집에 있는 돌, 이제 나는 그 돌을 버릴 수 없다.

 

돌을 보면 그 뜨거웠던 한여름의 배고팠던 그날이 떠오른다. 돌을 보면 친구 재근이가 생각난다. 친구 재근은 화순 춘양면이 고향이다. 깊은 산골이다. 도로의 자동차보다 하늘의 비행기를 더 자주 볼 수 있는 마을이다. 친구는 어렸을 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비행기의 조종사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 친구의 꿈이었다.
친구는 학교에 다니면서 계속 신문배달을 한 고학생이었다. 배달할 때 여러 광고전단지도 끼워서 배달한다. 영화 전단지를 배달하면 극장 입장권을 준다. 우리는 그 입장권으로 영화를 보았다. 제일극장에서 상영한 중국 검객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 지금도 생생하다. 주연 왕우는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이소룡과 성룡은 그 이후의 스타들이다.

 

친구 재근이는 공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 공군사관학교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2차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몸에 질병이 있다는 이유였다. 친구는 전남대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신체검사를 또 했다. 공사를 떨어지게 한 병은 늑막염이었다. 합격되었다. 입학금이 4만 5천이었다.
어떻게든 입학금을 마련해보겠다던 아버지가 오시기로 한 날 친구는 기차를 타고 오시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남광주역으로 갔다. 기차에서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무겁게 처져있었다. 입학금 마련을 못했음을 직감한 친구는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고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친구는 서울로 올라갔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신문 배달한 경험으로 한국일보사 모 지국을 찾아갔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건축기사 자격증을 딴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림산업에 취업했다.
친구는 88올림픽을 위해 건립하고 있는 잠실야구장 건립 기사로 일했다. 광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나는 겨울방학 때 친구를 따라가 잠실야구장 공사 현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야구장 객석의 의자 설치는 안 되었지만, 선수들이 경기하는 다이아몬드 구장은 벌써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나는 마운드에 올라 시구 폼도 잡아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아직 잠실야구장을 가보지 못했다. TV로 경기를 중계하는 영상을 볼 때면 그날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친구는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일찍 잠실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나는 친구랑 술 엄청 마시고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기도 했다.
친구는 신혼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친구 부인에게 미안하고 친구에게는 뻔뻔했기 때문이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시나브로 친구와의 연락이 끊기더니 어느덧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수소문하면 만날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란 것이 만남과 헤어짐의 파노라마가 아니던가.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삶의 나이테가 쌓이고 쌓여 칠십 나이를 넘고 보니 이제는 만나고픈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친구를 추억할 뿐이다.

친구, 잘 살지? 자네와 자취할 때, 설거지하면서 밥풀 몇 알 버린 나에게 화를 내면서 버려진 밥풀을 애돌와 하던 자네를 잊을 수 없네. 나는 지금도 자네의 그 검소함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네.

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