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삿갓시인 김병연 전설의 팩트체크

gureum 둔주 2020. 3. 9. 06:45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김삿갓 문학동산

 

선정을 펴야 할 관청에서 화적질 같은 정치를 펴니, 즐거워해야 할 정자 아래에서 백성들 눈물 흘리네

함경도 백성들 모두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 관찰사의 집안이 어찌 오래 가랴

 

 

방랑시인 김삿갓 가요 감상하고 전설을 팩트체크해볼까요

 

 

 

김삿갓 전설의 팩트체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일화나 역사적 사건이 세월이 흐르면 팩트는 희미해지고 과장, 미화, 왜곡된다. 이야기는 햇빛에 바래지고, 달빛에 젖으면서 전설이 된다.

선‧효행을 권장하는 교훈의 전설은 대개 해피엔딩이어서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억울한 죽음의 전설은 힘없는 민초들의 좌절된 소망과 함께 안타까운 여한을 남긴다. 억울한 한은 그의 꿈을 기억하는 수많은 민초들에 의해서 먼 후일 풀어지기도 한다. 녹두장군 전설이 품은 한은 백여 년이 흐른 뒤, 1987년 6월 민중항쟁으로 꽃피웠다.

 

전설은 스토리텔링 되어 지방자치단체의 관광객 유치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이는 먹고 즐기는 유흥 중심의 관광문화에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답사 문화로 바뀐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문화유적지마다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관광객들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전설은 어느 사이 사람들의 뇌리에 사실로 굳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예 전설의 사실 여부를 따져보려 하지 않는다.

해학과 풍자시로 백성들의 주름진 삶에 카타르시스를 선물한 방랑시인 김삿갓, 그가 치른 백일장 대회 장원급제의 안타까운 반전은 사실에서 벗어난 전설의 시작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는 1807년(순조 7년)에 태어나 1863년(철종 14년)) 3월 25일,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객사한 인물이다. 그의 나이 스무 살에 영월 고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한다. 시제는 홍경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은 정아무개의 충절과 투항한 김 아무개의 죄를 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김아무개이 죄를 논하는데 추상같았다고 한다. 그는 의기양양해 집으로 돌아가지만 홀어머니로부터 그 김 아무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큰 충격에 빠진다. 그 충격을 못 이겨 집을 뛰쳐나온 그는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생을 방랑으로 보낸다. 역적의 자손이니 불충이요, 할아버지를 하늘에도 들지 못하도록 욕했으니 불효라, 스스로 천지간에 용납 받지 못할 죄인으로 꾸짖으려 햇볕 아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

 

김삿갓 전설의 팩트체크에 천착하는 작가가 있다. 그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이문열이다. 그는 사실처럼 굳어진 김삿갓 전설의 흔적을 찾아 조사하고 역사의 기록을 재구성한 합리적 논리로 그의 일생을 조명한다. 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유려한 문장으로 김병연의 일생을 소설로 쓴다. 소설의 제목은 ‘시인’이다.

 

김병연이 여섯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 김익순이 평안도 농민전쟁 때 홍경래 군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김병연의 아버지는 가족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그와 그의 형 병하를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신시킨다. 2년 후 가족의 죄는 사면 받게 되어 형제는 다시 부친에게 돌아간다.

그 후 아버지 김안근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을 피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전설은 그가 과시를 마칠 때까지도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집안이 무너지는 불행은 특별한 기억력 없이도 잊기가 쉽지 않을 만큼 혹독했다. 어머니의 함구가 아무리 철저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젊은 어머니와 어린 그들 형제가 뿌리 없이 떠다니며 살아야 했던 까닭을 남달리 영민했던 그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영 이치에 맞지 않다. 오히려 그는 진작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더 크다. 그런 상황아래서 겪어야 했을 내심의 갈등을 이야기로 꾸미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은 전설의 안타까운 반전보다 더 감동적일 것이다.

 

순조 21년 그가 스무 살 나던 해 백일장 대회에 나갈 때, 그의 집안은 스스로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에만 매달린 형 병하 덕분에 어느 때보다 자리 잡혀 있었다. 그는 폐족이 된 가족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학문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은 성숙에 가까울 만큼 뻗어가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기 전 스스로의 성취를 가늠해 보려고 백일장에 응시한다. 그러나 과장에서 시제가 매달린 때부터 전설의 공간은 어긋나고 만다.

시제는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름을 굽어 한탄하라’였다. 가산군수 정시는 홍경래의 반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한 인물로 그 충절 때문에 당대의 선비에게 널리 추앙받던 인물이었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의 반군에 투항한 역적으로 규탄의 인물이었다.

그는 갈등한다. 그의 갈등은 조선을 떠받치는 이념의 두 기둥 충과 효의 충돌이었다. 동헌 벽 높이 걸린 그 시제를 본 뒤부터 붓을 들어 써나갈 때까지 한나절, 그의 갈등은 그의 일생동안 겪게 될 고뇌의 축약이었다.

그는 홀어머니의 기대의 눈빛을 떠올리며 할아버지를 규탄하는 글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신분상승의 의지로 피의 윤리를 이겨낸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를 부인함으로써 지배계급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겪은 가족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할아버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장원급제를 하고나니 그는 기쁨보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김병연의 장원급제는 그의 폐륜을 비난하는 화살이 된다. 가족은 더 깊은 산골로 숨어 든다.

그는 한때 책을 멀리 하고 농사를 지으며 신분 회복을 포기하는 듯했으나 그의 신분상승의 집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그는 과장 안으로 몸을 들여놓아 보지도 못하고 멀거니 구경만 하다가 돌아서고 만다. 그에게 체제의 벽은 너무 높았다. 정권의 실세 안동 김 씨 집안의 어느 누구 하나 도움을 주기는커녕 당장 한양을 떠나지 않으면 물고라도 낼 듯이 겁박한다. 폐족에서 벗어나 벼슬할 수 있는 길이 막막함을 절감한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절망과 신분 상승을 허용하지 않는 높은 체제의 벽에 대한 원망으로 그는 결국 집을 떠난 방랑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방랑 생활 중 가장 많이 찾은 곳은 할아버지가 반군에게 투항했던 그 반역의 땅 평안도였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김익순은,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역적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반군에게 투항한 것이 아니라 반군과 뜻을 함께한 동지였고 의로운 어른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썩은 조정에게는 역적이었지만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의로운 선각자였다. 법과 제도 아래서는 죄인이었지만, 진실 쪽에서 보면 의인이었던 것이다. 더욱 극적인 것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순절했다고 조정으로부터 충신으로 추앙받은 가산군수 정시, 그는 홍경래 반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애걸했다고 했다. 그러나 탐관오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잦은 그는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탐관오리 정시는 조정의 충신이 되었고, 선정으로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김익순은 조정의 역적이 되었던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혼돈 시대, 이긴 자의 명분을 위해 진 자를 파렴치하게 매장해 버리는 가혹한 현실 앞에 그의 마지막 선택은 시인이었다. 그는 입신을 위해 닦아온 정통 학문의 틀을 벗어버리고, 당당하게 김익순의 손자임을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비판과 조롱, 가련한 민초들의 맺힌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민중 시인으로 재탄생한다. 지배 계급은 그를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았지만, 민초들은 그에게 열렬한 갈채를 보낸다. 그는 시의 기본적인 격식과 운율마저 무시해버렸다. 익히 알려진 풍자시들은 이 시절에 쓴 시이다. 언문과 한문을 혼합한 파격의 풍자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쓴 시이다.

 

작가 이문열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체제를 거부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수용해 스스로 월북한 인물이다. 이문열의 나이 김병연보다 어렸을 적 일이다. 이문열이 체제를 거부한 반역자의 아들로서 겪어야 했을 고통은 김병연의 고통과 닮았을 것이다. 월북자 가족으로 감시의 눈길 받으며 힘겹게 살아온 가족사를 작가는 소설 ‘변경’에서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이문열이 삿갓 김병연 전설의 팩트체크에 천착한 것은 200여 년 세월의 간극을 넘은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병연이 신분 상승을 위해 할아버지를 비판하고 체제에 충성할 것을 글로 써 내려갔듯 이문열은 아버지가 선택한 체제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아버지가 거부한 체제를 적극 옹호한다. 김병연은 실패해 체제를 조롱하는 시인이 되었고, 이문열은 성공해 체제를 수호하는 보수의 대표 작가로 등극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그의 말년에 화순 동복면 구암리 압해 정씨 집 사랑에서 기거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곳에 가면 그의 시비들이 마을 입구 숲정이 따라 수십 기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시는 한자로 써져 있고, 아래 부분에 친절하게 한글로 풀어쓴 시도 함께 새겨져 있어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시들은 이 지방 유명 서예가들의 붓으로 새겨져 있다. 시 감상과 함께 유명 서예가들의 서예 감상도 함께 맛볼 수 있다. 비에 새겨진 붓의 흘림은 남도예술의 품격이다. 시인이 마지막 기거했던 압해 정씨의 사랑채도 복원해 놓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 일 년이면 수만이라고 한다. 산골 오지마을이 김삿갓의 종명지로 알려지고, 화순군이 스토리텔링해 소문난 관광 유적지가 된 것이다. 주차장 앞에는 병풍처럼 펼쳐진 거대한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김삿갓의 일생과 전설이 새겨져 있다. 한 편에는 거대한 화강암을 쪼아서 드러낸 시인의 환조 형상이 죽장에 삿갓 쓴 모습으로 친근하다. 방문객들의 포토 존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 익히 알려진 김삿갓의 전설을 맥락 없이 이야기로 흘려 들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문란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말기에 입신의 꿈이 좌절된 한 사나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으면 한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허망함이라하지만, 만약 김병연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었다면, 과연 그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는 시인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전설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