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일탈
어느 봄날의 일탈
1.봄이다
봄이 오면
대지는 겨우내 품은 생명의 씨앗을
묵묵히 싹틔워 올리지만
변덕 심한 대기는 찬바람 몰고 와
꽃을 시샘하기도 한다.
그날은
햇살 가득한 대기의 촉감이
아기의 볼처럼 따스한 봄
마음 들뜨게 하는 봄이었다.
이 좋은 봄날
백발의 우리는 청춘의 감성으로
도시를 탈출 일탈을 시도했다.
2. 영산포 홍어나루
자동차 전용도로를 시속 100Km로 달려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오기택의 청포도 처녀가 구수하게 흐르는
움직이는 음악 감상실에서 내려
강변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은 당연히 홍어정식이다
칠레산보다 값이 배나 비싼
흑산 홍어정식으로 우리는 식도락을 만끽했다
정암 형님이 비싼 음식 값을 쏘시고
조선 약턀의 전초기지 동양척식건물을
리모델링한 카페로 안내하여
일제 만행의 흔적들을 설명해 주셨다
깔끔히 단장한 카페의 운치는
아픈 역사와 겹치어 가슴이 아리었다
건물 앞 정원의 거대한 팽나무만
그날의 아픔을 알고 있다는 듯
하늘 향해 뻗은 가지들을
깃발의 함성처럼 펼치고 있었다
카페를 나와 찾은 영산나루는 한산했다.
강 언덕에 산수유 몇 그루의 노랑꽃 산뜻하고
고개 숙여야 보이는 작은 풀꽃은 청초했다
풀꽃은 십자가를 진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준 손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성녀 베로니카의 전설을 품고 있다
이 평화로운 강변에서
우리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
홍어 실은 황포돛배 드나들고
사람들 북적이던 옛 영산포를 회상했다.
3. 목포구木浦口 등대 가는 길
우리는 목포구 등대를 보기 위해
움직이는 음악 감상실에 올라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장사익의 ‘님은 먼 곳에’ 구슬프게 흐르고
시인 정암 형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고하도의 용머리를 지날 때 설명해 주신
삼호면과 용당龍塘의 의미
용당은 승천을 기다리는 용이 머문 못이고
삼호는 세 개의 호수를 뜻한다는데
금호방조제 공사 이후 이름처럼 정말
세 개의 거대한 호수가 생겼으니
옛 사람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하셨다
바다가 육지가 된 삼호공단 거리를 지날 때
축성사란 절의 안내판이 보였다
바다를 매립하기 전 그 옛날의 축성암이다
축성암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바위언덕에 세워진 자그마한 암자였다
경관이 아름다워
불자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더 많이 찾던 곳이었다
월탄 박종화가 한 때 이 암자에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축성암은 번뇌를 다스리는 참선의 도량으로는
파도 출렁이는 바다의 유혹이 너무 컸을 것이다
참선보다 사색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지금은?
축성암이 축성사 되었으니 짐작이 된다
시계의 바늘은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움직이는 음악 감상실은 화원반도에 들어섰다
내비게이션에 안내된 노란 색깔의 길이 꾸불꾸불하다
포장만 되어 있는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시골의 옛길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산이 막으면
산모롱이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 산을 넘었고
좁고 얕은 물이 막으면 노둣돌을 놓아 건넜으며
넓고 깊은 물을 만나면 나룻배로 건넜다
옛 어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속도로로 대표되는 현대의 길은
곧고 반듯한 직선이다
산이 막으면 터널을 뚫고
강이 막으면 다리를 놓는다
바다가 막아도 긴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든다
현대인들은 자연을 거스른다. 파괴한다
빠름빠름의 길 고속도로는
경제적 효율은 높이지만
삶의 여유와 낭만은 없다
느림느림의 옛 길은
이동의 속도는 느리지만
삶의 여유와 낭만이 있다
부드러운 곡선의 길 느린 속도로 나아갈 때
왼쪽은 다도해 섬들이 초가지붕처럼 아련하고
오른쪽 산비탈의 집들은 평화로웠다.
4. 木浦口 등대
길이 끝나는 곳에
숨겨진 듯 목포구 등대 공원이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목포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등대는
주변의 자연 경관과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탑의 순백과 횃불형상 빨강의 조화는 소박했고
탑의 조형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했다
그래서 예뻤다
늦은 오후의 햇살
바다의 잔물결에 부서져 튕기고
물보라 피어오른 시아바다 건너 아득히
천사대교가 꿈결처럼 신비했다
우리는 벅차오르는 감동 억제 못하고
꿈 많은 소녀처럼 ‘아!~~’ 감탄사만 연발했다
세 마리의 학과 강강술래 여인들 조형물을 배경으로
정암 형님도 봉산 형님도 사진 찍기에 정신없을 때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듯 여객선 한 척이
긴 포말 일으키며 등대 앞을 그림처럼 지나갔다
방향감각이 마비된 나에게
봉산 형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해 주신 그림 같은 섬들의 이름은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장산도
이 섬들은 시아바다를 감싸듯 자리하고
수평선 가까이 비금 도초가 희미했다
아! 시아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다. 호수였다
하여 시아바다를 맑은 호수, 청호淸胡라 했다
거울 같은 청호淸湖 바라보며
우리는 잠시 침묵의 상념에 빠졌다
바다의 시야는 넓다. 막힘이 없기 때문이다
육지의 시야는 좁다. 막힘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아를 발견하지 못함은
인간의 심연을 가로막는 에고 때문이다
막힘없는 바다처럼 아집 걷어낼 때 비로소
성찰의 눈으로 자아를 발결하게 될 것이다
상념에서 벗어난 우리는
바다를 향해 두 팔 벌려
심호흡으로 청정 공기 들이마시고
아쉬움 뒤로 한 채 등대공원을 떠나야 했다
이곳은 잠시 머물 곳이지, 삶의 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5. 집으로 가는 길
해는 바다에 더욱 가까이 내려오고
바다는 햇살을 되쏘는 물비늘로 눈부셨다
우리는 봉산 형님의 안내로
파인비치골프장도 구경하고, 해안가 시멘트 제방에 앉아
홍어 안주에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다음
집으로 향했다
화원반도를 지날 때 봉산 형님의 설명은
형님 어린 시절의 회고이고 삶의 고백이었다
자신의 호를 봉산으로 한 연유가
고향 마을 앞산 봉산에 있음도 비로소 알았다
형님의 진솔함은 그 근원이 고향이었다
허기를 달래준 물 밤의 추억어린 저수지를 지나
움직이는 음악 감상실은 금호 방조제로 들어섰다
지는 해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곧게 뻗은 직선의 고속도로 들어서니
자동차의 속도는 거침이 없었다
토스카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감상하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봉산 형님이 쏘신 영양탕 식사를 끝으로
일탈의 시간은 그 끝을 맞았다
일탈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우리들에게
일탈의 시간의 짧고
일상의 시간을 길 것이다.
2020.3.20.
일행을 대신해 둔주가 기록함.
음악이 맘에 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