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시대惡童時代 완성본
동무 생각
어린 시절
악동시대惡童時代
프롤로그
그 시절 소년의 고향은
6‧25전쟁 때 불타버린 금융조합의 앙상한 잔해가
민족상잔의 슬픈 상흔으로 시커멓게 남아있었고
사람들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허기진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가난했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의 독재정권 끝났지만
5‧16쿠데타로 박정희의 군사정권 들어서서
초등학생들까지 혁명공약 외우게 하고 사찰하니
어린 소년들의 정치의식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 시절 그 소년들이
흐르는 60여 년 세월에 풍화風化되어
이제는 나이 칠십 넘은 은빛노인 되었으나
젊은이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꼰대 취급 받으며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오늘날 이만큼 풍요를 누리기까지
은빛노인 그들이 젊었던 시절
궂은일 마다 않고 젊음을 불태우며 흘린
땀과 눈물의 공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늙었지만 그들에게도 한때
아름다운 신록新綠의 소년시절이 있었다
악동시대는 신록의 소년시절을 회고하며
추억을 공유하는 죽마고우들에게 바치는
칠십 노인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1. 꽃감
1961년 소년의 나이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일 때이다. 단풍은 이미 졌지만 첫눈은 아직 이른 을씨년스러운 어느 날 오후,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비웠다. 아이들은 해방을 맞은 듯 천방지축 날뛰었다. 소년은 친구들 몇 명과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를 하였다. 한참 신나게 공을 차고 있는데, 한 아이가 뛰어오더니 “야, 꽂감이 빨리 교실로 들어오라고 해야.”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긴장으로 굳어졌다. 아이들은 교감선생님을 꽂감이라 불렀다. 호랑이도 무서워 벌벌 떠는 꽂감이라 부를 만큼 교감은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무서운 교감을 꽂감으로 비틀어 부름으로써 오히려 희화의 대상으로 즐길 만큼 아이들은 재치 있고 익살스런 악동들이었다.
소년과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겁먹은 모습으로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자, 호랑이 얼굴로 교단에 꼿꼿이 서서 아이들을 노려보던 꽃감이 “자리에 앉지 말고 뒤로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아이들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교실 뒤로 가 엉거주춤 섰다. 꽂감의 차가운 명령이 이어졌다. “둘씩 마주보고 서”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마주 보고 섰다. “서로 뺨을 한 차례 씩 때려.”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꽂감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소년은 마주 본 친구의 뺨을 왼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친구도 소년의 왼쪽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소년과 친구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더 세게 때려” 꽂감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친구는 소년의 뺨을 가만히 때렸다. 소년도 친구의 뺨을 가만히 때렸다. 꽂감의 명령은 이이지고 소년과 친구는 점점 세게 서로의 뺨을 때려갔다. “철석”, “철석”, 아이들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뺨을 때리는 손바닥의 힘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뺨은 붉게 부어올랐다.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뺨을 주고받는 친구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키득키득 소리 죽여 웃다가, 어느새 웃음기는 사라지고 무거운 공포의 분위기로 젖어들어 갔다. 꽂감은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뺨을 주고받는 동안 정겨운 친구에서 증오의 적이 되어버린 아이들을 자리에 가 앉으라고 명령했다.
천하의 개구쟁이들을 단숨에 장악해버린 꽂감은 겁먹어 쥐죽은 듯 조용한 아이들에게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링컨 대통령은 느그 나이 때 가난해서 학교도 다지지 못한 것 알고 있냐?” 교실의 아이들은 침묵했다. 꽂감의 열변은 계속 되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변호사를 했어.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훌륭한 변호사였다고 오~~”
꽂감은 링컨이 변호사로 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일화의 내용은 이렇다.
-변호사 사무실로 어느 날 허름한 차림의 나이든 여인이 링컨을 찾아왔다.
여인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앞뒤 맥락 없이 애걸하듯 말했다.
“변호사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시오. 우리 아들은 죄가 없으라우.”
“어머니, 우선 자리에 앉으시고요. 차분하게 말씀해 보세요.”
링컨은 여인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말하라 했다. 자리에 앉은 여인이 긴 한숨 토하며 말한 내용은, 아들이 살인죄로 수감 중이고 곧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링컨은 어머니에게 재판일 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큰 걱정 마시라 위로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찾아보고, 교도소를 방문해 수감 중인 여인의 아들 스티븐을 면회했다. 스티븐은 링컨에게 사건 당일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스티븐은 친구들과 모월 모일 밤 해변 백사장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고 했다. 밤은 깊어가고 술에 만취한 스티븐은 모랫바닥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고 했다. 찬이슬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마이클이 죽어있었고, 자신이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살인범으로 체포된 근거는 목격자 닉슨의 증언 때문이라고 했다. 닉슨이 소나무 숲으로 가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스티븐이 칼로 마이클의 가슴을 찔렀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술에 취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일이 돌아오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의 피의자 심문이 있었다. 피고인 스티븐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검사가 요청한 증인의 증언이 끝났다. 유죄가 확실해 보였다.
변호사 링컨이 재판장 앞에 섰다. 링컨은 증인 닉슨에게 물었다.
“증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이 대강 새벽 2시쯤이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네”
“살인사건 현장과 증인이 목격한 소나무 숲은 20m가 넘는데, 어떻게 범인이 스티븐이라고 단정할 수 있죠?”
“달밤이라 확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증인 심문을 마친 링컨은 재판관 앞으로 나가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은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은 음력 초사흘입니다. 음력 초사흘은 초저녁에 서쪽하늘에 눈썹 같은 달이 잠깐 떴다가 금방 지고 맙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각 새벽 2시쯤에는 하늘에 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달빛에 스티븐의 살인 장면을 봤다는 것은 위증입니다. 깜깜한 밤에 소나무 숲에서 20m 떨어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증인은 마이클을 죽이고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던 스티븐에게 살인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증인 닉슨을 심문했다. 증인 닉슨은 오열하며 자백했다.
마이클과 닉슨은 사소한 일로 다투다 그만 닉슨이 마이클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술에 취한 우발적 사고였다. 겁이 난 닉슨이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모두 모랫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닉슨은 홀어머니랑 사는 스티븐이 만만하게 보였다. 닉슨은 스티븐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죄를 은폐했던 것이다. 재판 결과 닉슨은 살인죄로 구속되고 스티븐은 무죄로 풀려났다.-
“이놈들아 박수 쳐.”
꽃감의 버럭 소리에 아이들은 우레같이 손바닥을 쳐댔다. 아이들은 어느새 잔잔한 감동의 얼굴로 꽂감의 열변에 빠져들었다. 소년은 친구를 보았다. 친구는 웃고 있었다.
에필로그
이듬해 3월 꽂감은 발령이 나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된다. 소년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우울했다. 순이도 전학을 가기 때문이다. 순이는 꽃감의 딸이다. 순이는 한동안 전학을 가지 않다가 나중에야 아빠 학교로 전학을 갔다. 소년에게 순이는 황순원 소나기의 윤 초시네 손녀 같은 존재였다.
2. 비오는 날
1962년 소년의 나이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일 때이다. 소년은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백일장대회에 학교를 대표하여 참가했다. 대회 하루 전 오전 수업을 마치고 소년은 선생님을 따라 학교를 나섰다. 교통이 불편해 해남읍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시간에 맞춰 대회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소년은 흙먼지 날리는 자갈길을 지나고 황토고갯길을 넘어 월암고개까지 걸어서 갔다. 소년의 집이 있는 마을에서 월암고개까지는 2km 정도 되지만, 학교에서 월암고개까지는 5km가 넘는 거리였다.
월암고개는 광주와 해남 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버스를 타는 간이정류소였다. 정류소라야 달랑 오두막 한 채뿐이었다. 산허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황토자갈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집이다. 주변은 한낮에도 호젓했다.
월암고개 정류소에 도착한 소년은 강진으로 출장 다녀오신 아버지를 밤늦게 기다린 기억을 떠올렸다. 별빛도 구름에 가려 사위가 깜깜한 밤에 버스의 불빛이 보일 때, 그 빛은 너무 아름다웠다. 직진하는 라이트 빛보다 지붕과 차창 옆에서 반짝이는 붉은 색, 주황색, 초록색 빛은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깜깜한 밤에 버스는 설레는 빛으로 움직였다. 빛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버스가 산모롱이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 나오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산허리 돌고 돌아 버스는 마침내 정류소에 멈추었다. 버스에서 내리신 아버지와 함께 소년은 어두운 산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이 기억을 더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울퉁불퉁 자갈길 먼지구름 피우며 버스가 굴러왔다. 소년은 선생님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정류소마다 멈추어 손님을 태우고 내렸다. 옥천면소재지를 지나고 굽이굽이 우슬재를 털털거리며 넘어 오후 늦게 마침내 해남읍에 도착했다.
다음 날, 백일장대회가 실시되었다. 글감은 ‘비’, ‘선생님’, ‘부모님’이었다.
소년은 부모님과 선생님을 중심으로 월암고개의 추억과 전날 선생님을 따라 해남읍으로 가는 길 우슬재의 정경을 떠올리며 글을 써내려갔다. 글은 하나의 소재로 자세히 써야 좋은데, 소년의 글은 월암고개, 아버지, 선생님, 우슬재 등 소재는 많고 감동은 없었다. 소년의 글은 산만했다.
오후에 심사결과 발표와 시상이 있었다. 소년은 가슴 조이며 발표에 귀를 세웠다. 장려상부터 차례로 발표했다. 소년의 이름은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마지막 최우수상 발표만 남았다. 드디어 장학사의 입이 열렸다. “최우수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장학사는 잠깐 뜸을 들인 뒤 “최우수상은 화산초등학교 이순이! 이순이 학생은 앞으로 나오세요” 소년은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는 여자는 꽂감의 딸 그 순이가 분명했다. 단발머리 순이는 예뻤다. 소년은 가슴이 떨렸다.
시상식이 끝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순이의 *문화방송 인터뷰가 있었다. 먼저 최우수상을 받은 글의 낭독이 있었다. 순이가 낭독했다.
-제목은 ‘비오는 날’.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엄마 아빠가 우산을 가져와 집으로 갔다. 그러나 순이는 아빠가 없고 엄마는 바쁘기 때문에 오실 수 없다. 순이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우산을 씌워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순이는 선생님이 아빠처럼 느껴졌다.-
‘비오는 날’의 간단한 줄거리이다.-
아나운서가 순이에게 가정환경을 물었다. 순이는 엄마랑 단둘이 살며 엄마는 삯바느질을 한다고 대답했다. 소년은 소름이 돋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 하는 순이의 앙큼함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산문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활문이어야 한다. 거짓말을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순이는 거짓글을 썼다. 거짓글에 맞추어 인터뷰를 해야 하니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교감으로 있는데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고 하는 등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이가 전학 안 갔으면 우리 학교가 1등인데” 선생님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년의 발길은 무거웠다.
에필로그
1. 순이는 전학 가기를 싫어했다. 울면서 전학가기 싫다 하니 꽂감과 엄마는 할 수 없이 후임으로 오신 문교감 댁에 순이를 맡기고 화산초등학교로 전근 가셨다. 그러나 얼마 후 순이는 아빠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문교감이 옷장에 둔 돈을 도둑을 맞았고, 순이가 의심을 받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다행히 순이가 떠난 뒤 도둑은 잡혔다. 도둑은 둔주포에 사는 4학년 아이였다. 홀어머니랑 사는 가난한 아이가 돈을 헤프게 쓰고 다녀서 추궁 끝에 자백을 받고 남은 돈을 회수하였다.
소년이 순이를 본 것은 백일장대회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소년은 늙어 칠십이 넘었다. 그러나 칠십 노인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순이는 아직도 13세의 앙큼한 소녀이다.
2. 순이의 글은 다분히 신파적이다. 소년소녀 문학잡지에 보면 비슷한 글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은 순이는 어떤 글이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여 심사위원들이 감동할만한 신파적 글을 영리하게 창작한 것이다. 그날 소년은 순이의 글을 거짓글이라고 실망했지만, 돌아보면 순이는 성숙했고 소년은 순진했다. 훗날 소년은 교사가 되었다. 그는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을 지도할 때, 먼저 예상되는 글감을 나열했다. 그리고 글감과 어울리는 감동적 경험을 더듬어 기억해내게 했다. 없으면 감동적 사연을 창작하게 했다. 아이들은 매번 상을 받아왔다.
3. 문화방송은 1960년 대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 집집마다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를 설치하고 라디오뉴스나 음악을 보내는 유선방송이다. 학교에서 각 교실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방송실에서 방송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소년의 고향에도 유선방송이 있었다. 사업자가 소년의 집 사랑채에 방송기기를 설치하고 방송 사업을 했으나 전선의 유실이 잦고 사업이 잘 안 돼 몇 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가난한 시골에 문명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문화시설이었지만, 라디오 보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사라지고 말았다.
3. 교장은 우리만 미워해
월요일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애국조회를 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한 모임? 교장의 훈화도 나라를 사랑하는 교훈의 말씀 애국훈화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애국조회는 지루하고 짜증난 시간이었다. 애국조회 시간 내내 꾸중과 질책뿐, 칭찬이나 격려 등 아이들의 사기를 진작 시키는 말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교장선생님의 애국훈화를 하고 싶은 것은 하지마라하고 하기 싫은 것만 하라고 하는 잔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애국조회 시간, 경쾌한 행진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운동장은 아이들로 꽉 찬다. “앞으로 나란히”, “바로”, “열중쉬어”, “차렷” 교단에 높이 선 생활주임의 카랑카랑한 구령을 따라 아이들은 줄을 맞춘다. 국민의례가 있고 이어서 주번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와 한 주일 동안 지켜야 할 주훈을 발표한다. 마지막 교장선생님의 애국훈화 말씀시간이다. 담임은 아이들의 줄을 점검하고 정신을 환기시킨다. 그래도 뒷줄의 아이들은 은밀하게 해찰을 부린다. 키 작은 소년은 맨 앞에서 바른 자세로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오늘도 교장의 꾸중은 변함이 없다. “특히 6학년은 저학년 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말썽만 부려? 청소도 제일 못하고......” 6학년만 콕 찍는 꾸중에 아이들은 불만의 얼굴로 툴툴댄다.
청소시간이다. 소년의 청소구역은 교장 사택 쪽 화단이다. “야, 오늘 청소는 잘해불자. 맨날 교장이 우리한테 청소 못한다고 항게.” 소년의 말에 친구들도 생각이 같았는지 열심히 청소를 한다. 청소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즈음 담임선생님이 오신다. “으음, 청소들 잘하는구나.”담임의 칭찬이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은 우리보다 청소를 못한다고 해요. 맨날 꾸중만 하시고.....” 일수의 불만에도 선생님은 별 말씀 없이 가셨다. 선생님이 가시고 조금 있다 교장선생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다. 아이들은 큰소리로 인사한다. 칭찬을 기대했으나 교장은 무심히 가신다.
“우리 데모해불까?” 소년의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빛난다. “내일 공부하지 말고 모여 산으로 올라가불자.” 일수의 말에 친구들은 모두 찬성했다.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교실의 친구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시 아이들에게 데모란 말은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4‧19학생혁명과 5‧16군사쿠데타로 소용돌이치는 정치의 파도가 아이들에게 까지 밀려온 이유도 있지만, 연세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와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의 결과가 컸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백여 명의 연세 대학생들이 마을마다 십여 명씩 분산하여 열흘 간 거주하면서 아이들에게 노래, 게임, 운동 등을 즐겁게 가르치고 함께 놀아주었다. 대학생들은 4‧19혁명의 주인공이었다. 한 대학생은 총상으로 다리를 절었다. 마지막 날은 학교에 모여 축제를 열었다. 아이들은 마을대항 축구대회를 하고, 대학생들은 야구시합을 하였다. 소년은 생전 처음 야구공과 야구글러브와 배트를 보았다. 대학생들이 머문 열흘은 아이들에게 꿈같은 날들이었다. 아이들은 더 넓고 높은 세상을 경험했다. 정치의식도 생겼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잠자리에서 친구들과의 모의를 생각했다. ‘에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인데....내일 일수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야겠다.’
다음날 소년은 조금 늦게 학교에 갔다. 소년이 교문을 들어서자, 6학년 친구들이 대오를 갖춰 운동장을 뛰어 돌고 있었다. 연세 대학생들이 가르쳐준 응원가 “아카라치차 아카라치초 아카라치차차초초초”를 목청껏 부르면서 뛰었다. 어린이 회장 영원이가 제일 앞에서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일수가 소년을 보더니 말한다. “데모 시작했응께 빨리 와야” 소년은 잠시 당황했다. 이내 소년은 데모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이들은 학교를 벗어나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그냥 따라 나온 거 같았다. 공부하기 싫은 악동들의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막상 대오를 이끈 회장도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회장이 소년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했다. 소년이 앞으로 나오자 아이들은 함성으로 호응했다. 소년의 연설에 아이들은 함성과 박수로 화답했다.
열기가 최고조에 이를 때 담임선생님이 올라오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열렬히 환영했다.“내가 잘못해서 이러냐?. 그럼 내가 담임을 그만둘게” 담임의 얼굴이 슬프게 보였다.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소년이 선생님께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일단 내려가자고 하셨다. 아이들은 웅성웅성 어찌할 줄을 모른다. 소년이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자고 한다. 누군가 연세 대학생에게 배운 노래를 선창하자 아이들이 일제히 따라 불렀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기약 없는 서러운 이별/ 나간다고 서러워 마라/ 때가 되면 다시 오리라’ 아이들은 순한 양처럼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서자 교실에는 두 아이가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식이와 삼식이다. 하식이는 부잣집 막둥이로 누나가 선생님이다. 2학년 담임이다. 삼식이는 소년보다 한 살 위이다. 선생님들이 좋아할 전형적인 범생이다. 아이들은 두 아이를 비겁하다고, 배신자라고 수군거린다. 그러나 소년은 두 아이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아이가 두렵기 까지 했다. 김수재는 교장의 아들이다. 수재는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갔고, 교장 규탄 구호를 외쳤다. 선생의 동생 하식이는 누나가 있어 동참하지 않았고, 교장의 아들 수재는 분위기에 휩쓸려 산에 올랐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회장 영원이와 소년을 비롯한 주동자 다섯 명이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 아들 수재도 있었다. 아이들은 교장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교장의 표정은 복잡했다. 황당하고, 화나고, 당황한 듯 보였다. “수재 너 이리와” 교장의 말에 수재가 교장 앞으로 나갔다. 교장은 수재의 뺨을 힘껏 때렸다. 수재는 비틀하다가 다시 바로 섰다. 교장의 손바닥이 또다시 수재의 뺨을 친다. 교장은 애먼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교장은 회장부터 한 사람씩 불러 따지듯 물었다. 아이들은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소년이 불려나갔다. 소년은 교장이 6학년만 미워한다는 아이들의 불만을 그대로 전달했다. 소년의 말은 조리가 있었다. 소년은 떨리지 않았다.
교장이 한숨을 쉬면서 뱉듯이 한말은 “야~~, 그것은....수재가 6학년이잖아.”
아, 교장은 아들 수재 때문에 6학년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칭찬 대신 교편敎鞭을(교육을 위한 채찍을 뜻함) 든 것이었다. 교장은 아들에게 바라는 소망을 담아 이름도 수재라 지었다. 막상 수재는 천진한 개구쟁이일 뿐 수재답지 않았다. 교실로 돌아온 다섯 아이들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아이들은 하루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
다음 날 교장 아들 수재가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너 칭찬 많이 했어야.”
소년은 교장선생님께 죄송했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데모사건은 시간과 함께 묻히어져갔다.
4. 풍년 되세요
보릿고개 시절, 정신없이 바쁜 농번기가 되면 초등학생들도 일손을 보탰다. 그날도 6학년은 공부는 안 하고 보리 베기에 동원되었다. 보리 베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꽁보리밥으로 아침 대충 때운 아이들의 뱃속은 보리밭 주인이 나눠준 비과 하나와 퍼마신 냉수가 전부였다.
구름 없는 중천의 햇살을 받으며 배고픈 아이들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데, 신작로 옆의 논에서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모를 심고 있었다. “야, 보리 베고 오냐?” 한 아저씨가 허리를 펴면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들은 “네” 건성으로 대답하고 힘없이 지나는데, “배고프지야아~~” 아저씨의 말에 아이들은 걸음을 멈추고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한다. “못단 옮겨주면 밥 주지~~이”
아이들은 다리를 걷고 논으로 들어가 못단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때 못밥을 이고 용지리 쪽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못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오줌 마려운 형운이가 논에다 고추를 드러내고 오줌을 쌌다. 밥 주겠다던 그 아저씨가 정색을 하며 형운이를 나무랐다. “이놈아 농사 망칠일 있냐?” 얼쯤한 형운이를 대신해 다른 아이가 말한다.“오줌은 거름되고 좋잖아요.” 아저씨가 화낸 얼굴로 “그것은 오줌을 삭혔을 때고, 생 오줌은 독해서 벼가 다 죽는단 말이야.” 이러면서 아이들을 마구 쫒아냈다.
아이들은 논에서 쫓기듯 나왔다. 투덜거리는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골리듯 하는 말 “느그들 이 농사 망치기를 바라지야?. 그러먼 이 논에다 개똥을 버려부러라” 의아해 하는 아이들에게 아저씨의 말은 이어졌다. “논에다 개똥을 버리면 농사를 망치고 자갈을 넣으면 풍년이 든단다.” “왜 그란다요” 형운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묻자. “아, 개똥은 독이고 자갈은 거름잉게 그러제” 아저씨의 말끝에 소년이 대들 듯 가까이 가 차분하게 말했다.“아저씨, 우리는 배우는 학생인디 어찌 농사를 망치게 하겠어요? 풍년 들게 해야지요. 거름 되라고 논에다 이 신작로 자갈 다 넣어 줄게요.” 아저씨는 웃었지만 소년은 웃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저씨를 향해 불량기어린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언제 배가 고팠냐는 듯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이순신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아저씨는 악동들을 잘못 건드렸다. 아이들은 메마른 신작로 흙먼지 날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복수를 다짐하면서
다음날 마을의 아이들 등교를 위해 회관 앞에 모였다. 그 당시엔 마을별로 모여서 등교를 하였다. 이를 통학반이라 불렀다. 아이들의 수는 육십 명이 넘었다. 통학반 아이들이 어제의 그 논 앞에 이르렀을 때 소년이 아이들을 모두 멈추게 했다. 아이들에게 길의 자갈을 들어 논으로 던지라 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돌을 던졌다. 1학년 꼬맹이들까지 고사리 손으로 길가의 작은 돌을 들어 논으로 던졌다. 그러나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가는 아이가 있었다. 6학년 하식이와 삼식이다. 이 모습을 본 4학년 응철이가 그냥 가버린다고 투덜거렸다. 소년은 하식이와 삼식이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더니 신나게 돌 던지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만 하자. 돌 그만 던지고 줄맞춰”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줄을 맞춰 학교로 향한다. 학교 가는 내내 소년은 말이 없었다.
다음날 학교 가는 길, 어제의 그 논 앞에 이르자 아이들은 걸음을 멈추고 돌들 줍는다. “그냥 가자” 통학반장인 소년의 말에 아이들은 아쉬운 듯 들었던 돌은 놓았다. 악동들의 복수?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벼들은 하루가 다르게 녹색이 짙어지고 줄기는 분얼했다. 들판이 녹색물결 넘치는 무더운 여름이 오자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악동들은 방학 내내 냇가서 첨벙대고 그늘진 곳에 모여 땅뺏기 놀이를 하는 등 해방 된 나날을 보냈다.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곧 뒤따라 가을이 왔다. 벼들은 배동이 올라 줄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벼꽃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가 했더니, 어느새 벼이삭 여물어가고 그 푸르렀던 녹색 물결은 황금물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풍년이 들었다.
가을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황금물결 넘치던 들판은 점점 비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애증의 추억이 깃든 논의 벼들도 베어지고, 볏단으로 묶여 논둑에 쌓였다. 그리고 얼마 후 볏단마저 농부의 지게에 얹히어 사라졌다.
빈 논은 벼 잘려나간 그루터기만 열병식 하듯 줄맞춰 풍년의 뒤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빈 논은 학교 운동장보다 거칠지 않아 아이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가끔 아이들은 학교공부 마치고 해찰부리며 집으로 가는 늦은 오후에 논으로 들어가 축구를 했다. 늦가을의 짧은 해 서산마루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축구를 했다. 논에는 자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에필로그
1. 임하식은 얼굴도 예쁘고 노래를 잘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식이와 소년은 학예회 때 무대에 올라 2중창을 했다. 졸업식의 하이라이트 답사도 하식이가 낭송했다. 마을별 축구시합 때 소년은 하식과 한 팀이다. 팀은 강했다. 다른 마을의 경계 1호였다. 악동들은 가끔 하식이 집 마당에서 배구를 했다. 넓은 마당에 빨랫줄을 네트 삼아 배구를 했다.
한 번은 하식이가 소년을 누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은 뒤란 쪽이라 한낮에도 어두침침했다. 경대에는 화장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치자꽃 향내음이 깊게 스민 방이었다. 소년은 왠지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월이 흘러 하식이는 광주서석고등학교 수학교사가 되었다. 1989년 정부에서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들에게 압력을 가하자 많은 교사들이 탈퇴 하였다. 그러나 하식은 마지막까지 사퇴를 거부해 결국 해직되고 말았다. 하식은 3학년 담임을 하면서 수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고삼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식이의 사연은 고삼제자들이 교육부에 보낸 탄원서와 함께 전국에 알려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해직은 번복되지 않았다. 하식은 학동에서 수학학원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정부가 바뀌고 전교조가 합법화 되면서 하식이도 복직되었다. 전남여교 수학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 해 5월 교직원 배구 대회가 있던 날. 초등학교교사가 된 소년과 하식은 각각 학교의 대표로 참가하면서 만났다.
하식은 전교조에 가입만 했지 앞장서서 활동하지 않았다고 했다. 후배 교사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명단에 이름이나 올렸다고 했다. 회원들이 하나 둘 탈퇴를 하고 정부의 압박이 더해질 때는 무서웠다 했다. 교장으로 있는 장인이 오셔서 탈퇴하라고 강요할 때는 갈등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탈퇴를 거부한 것은 용기가 있어서도 아니고, 전교조를 지키기 위한 사명감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냥 쪽팔리기 싫어서 거부했다고 했다. 뉴스보도는 자신을 투사처럼 묘사했지만 정작 자신은 전교조 활동에 별 흥미도 없었다고 했다. 하여 해직 된 이후로는 전교조 교사들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지금은 전교조 회원도 아니라고 했다.
“쪽팔리기 싫어서 사퇴 안 했어야.” 하식의 말은 늙은 소년의 가슴에 긴 여운이 되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30여 년 전의 미소년 하식의 추억을 기억 밖으로 끌어올렸다.
2.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삼식은 천방지축 악동친구들과는 달랐다. 떼 몰려다니며 노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졸업식 때는 면장이 주는 새마을 상을 받았다. 상품은 농기구 삽이었다.
마을에서 겨울철 서당을 열어 삼식과 친구들도 서당을 다녔다. 학교와 달리 서당은 학습 능력에 따라 아이들의 학습 진도가 달랐다. 어떤 아이는 빨리 천자문을 마치고 사자소학을 배우는가하면 겨울 내내 천자문만 배우는 아이도 있었다. 서당을 여러 철 다닌 재화는 소학을 배우고 형들은 명심보감을 배웠다.
소년은 또래 아이들 보다 빨리 천자문을 마치고 다음 단계인 사자소학을 시작했다. 얼마 후 천자문을 마친 삼식은 명심보감을 시작했다. 사자소학을 건너 뛴 것이다. 소년은 삼식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삼식이도 자기의 선택을 설명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식은 마을의 사진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사진기술을 배웠다. 사진관 사장이 질병이 있어 돌아가시자 광주로 가 사진관에 취직을 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고향 마을로 내려와 사진관을 차렸다. 운영이 잘 되었다. 시골에서 소박하게 사업하기에는 꿈이 컸는지 삼식은 다시 광주로 올라갔다. 삼식은 예식장 기사로 일하고 부인은 광주여고 쪽에서 식당을 하였다. 여고생들을 상대한 액세서리 매점도 여는 등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동창들의 모임에도 참석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만남은 뜸해지고, 소식도 멀어지면서 삼식은 회색빛 사진 속 추억이 되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 말에 의하면 IMF 이후 전화도 안 받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5. 도망가지 마
소년과 마을 친구들은 휴일이면 가끔 이웃면의 마산동교로 가서 그곳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했다. 굳이 그곳으로 간 까닭은 계곡서교보다 가깝기도 하지만, 소년이 5학년 1학기까지 마산동교를 다니다 계곡서교로 전학을 와 그곳의 친구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때는 가을, 들녘은 누렇게 여물은 벼들이 제 무게를 못 이겨 겸손히 고개 숙인 황금물결이었다. 소년들은 자갈 많은 신작로를 걸어 마산동교로 갔다. 교문 앞 텃밭의 고추는 따가운 햇살 아래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소년들은 먼저 와 놀고 있는 마산동교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했다.
현대 축구는 전략전술에 따라 4.2.4, 4.4.2 등 다양한 포지션이 있지만 그 당시 소년들의 축구는 2.3.5 포지션뿐이었다. 2.3.5란 풀백 2명, 하프진에 3명 포드진에 5명이 포진한 포지션이다.
소년의 팀은 순기가 현대 축구의 미드필더 자리인 하프센터를 맡고, 소년이 공격의 중심 센터포드를 맡았다. 그리고 채오가 라이트 윙을 맡았다. 삼각편대의 완성이었다. 상대 팀도 포지션을 정하고 전략을 세웠다.
드디어 축구가 시작되었다. 양 팀 모두 처음에는 제법 전략대로 축구 흉내를 냈지만, 이내 전열은 흐트러지고 마냥 공만을 쫓아 떼 몰려 움직였다. 동네 축구의 전형이었다. 하여 한두 명의 발재간 좋은 친구가 있으면 득점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반칙도 핸들링 정도만 있고 업사이드 반칙은 아예 없었다.
소년과 친구들은 호흡이 잘 맞았다. 모이면 축구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놀이였기 때문이다. 패스의 기본인 삼각패스로 상대 진영의 수비를 따돌리는 것은 제법 어른들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라이트 윙 채오가 수비를 제치고 코너 깊숙이 공을 몰고 가 골대 앞으로 센터링하면 소년이 잽싸게 받아 골인으로 연결하는 전술은 잘 통했다. 성인 축구는 골이 많이 나지 않지만 소년들의 축구는 골이 많이 나왔다. 대여섯 골은 기본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시합이 끝났을 때 소년들의 땀범벅 얼굴에 가을햇살이 반짝였다. 축구할 때는 몰랐지만, 시합이 끝난 소년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해는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향하는데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가는 길은 여러 길이다. 맹진다리 건너는 신작로를 따라 가는 길과, 귀댕이 산골로 가는 길 그리고 신촌앞들 지나 공동묘지 밑으로 가는 길이 있다.
소년들은 집에서 올 때는 맹진다리 건너는 신작로로 왔지만 집으로 갈 때는 귀댕이 산골길을 택했다. 누가 그 길로 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발걸음은 자연스레 귀댕이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허기를 달랠 먹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산에는 정금, 알밤 등이 익어가고 밭에는 오이, 가지 등이 있고 고구마 밭도 있었다. 소년들은 논길을 한 줄로 늘어서 갔다. 옥천면 기름진 들을 적시고 북창 앞 바다로 흘러가는 냇물도 건너야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밭둑길을 지나 귀댕이 산골로 접어들었다.
귀댕이 산골은 낮은 산봉우리들이 젖가슴처럼 이어졌다. 산골을 넘으면 산과 산 사이에 제법 넓은 분지가 있었다. 다랑이 논이 있고 산기슭은 밭이 있었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산지기 집 한 채뿐 마을은 멀었다.
분지로 들어선 소년들은 산기슭의 밭으로 갔다. 밭은 녹색 윤기 발하는 고구마 줄기로 뒤덮여있었다. 밭 귀퉁이 한 곳이 줄기가 젖혀지고 헤집어져 있었다. 주인이 고구마를 캔 흔적이었다. 소년들은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 줄기를 헤치고 고구마를 캤다. 그리고 밭둑으로 올라와 흙 묻은 고구마를 풀에 쓱쓱 문질러 대충 털어내고 먹기 시작했다. 그때 건너편 산지기 집에서 밭주인이 농기구를 손에 들고 악을 쓰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소년들은 후다닥 일어나 산 쪽으로 도망치지 시작했다. “도망가지 마.” 소년이 고함쳤다. 겁먹어 도망치던 친구들은 엉거주춤 섰다. “도망치지 말고 그대로 있어봐.” 소년이 말하자 그 뜻을 비로소 이해한 친구들은 야릇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밭둑에 서서 달려오는 밭주인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지기 집 앞을 지나야 했다. 산으로 도망쳐봐야 어차피 다시 내려와야 한다. 흩어져 도망치다 보면 약한 누군가는 주인에게 잡힐 것이고..... 소년들은 흩어져 도망치다 잡히는 것보다 뭉쳐서 버티기로 했다.
악을 쓰며 달려오던 밭주인은 소년들이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서있자,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서서 “야 이놈들아 도망도 안치냐?” 라고 악만 버럭버럭 썼다. “죄송합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요....” 소년이 밭주인에게 공손하게 말하자 “아저씨가 캔 자리에서만 캤어요. 다른 데는 헤치지 않았어요.”채오가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응철이가 말했다. 밭주인은 황당한 얼굴로 소년들을 한참 보더니 “느그들 어디서 왔냐” 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둔주포요” 소년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주인은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타이르듯 훈계했다. 소년들은 공손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밭주인 앞을 조심조심 지나갔다. 손에는 먹다 남은 고구마가 들려있었다. 밭주인은 붙잡지 않고 길을 내줬다. 소년들은 무사히 집으로 갔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집으로 왔을 때는 어느덧 가을의 짧은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악동들의 하루는 또 그렇기 마무리되고 있었다.
에필로그
부모들은 자식들을 학교 보낼 때, 어쩌든지 공부 잘해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부모들에게 공부란 교실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교과서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 따라 열심히 공부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공무원 등 취직시험에 합격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만이 공부의 전부였다. 이런 공부를 잘하는 것이 가난한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이 같은 공부에 대한 개념은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의 소망과 선생님의 훈육에 세뇌된 아이들도 공부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싸돌아다니며 뛰노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강요하는 공부는 싫고 어른들이 못하게 하는 장난질은 너무너무 좋은 이율배반에 일종의 죄의식 같은 심리도 있었다.
아, 그러나 돌아보니 아이들에게 공부란 그들의 하루생활 전부가 공부였다. 그들의 생활공간은 모두 학습의 장이었다. 또래와 후배 그리고 선배들과 어울려 놀면서 익히는 공정함, 배려, 존중, 희생, 봉사 등의 아름다운 덕목은 교실에서 배울 수 있는 공부가 아니었다.
경쟁심을 유발하여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는 학교교육의 결과는 상위 소수의 학생들만 선택받고 다수의 소외된 실패자만 양산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세계는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는 일도 없고, 소외된 실패자도 없었다. 서로 함께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기능과 개성에 따라 맡은 역할이 달랐을 뿐이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과정 모두가 공부이다. 그리고 삶의 공간 전부가 학교이다. 은유적 표현으로 교도소도 대학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하긴 교도소에서 범죄자는 범죄의 수법을 재구성하고, 양심수는 인생을 더욱 심오하게 궁구한다고 하니 가히 틀린 표현도 아닌 듯하다. 하여 20대 이후의 삶의 공간을 인생대학이라 할 수 있다.
소년의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인생대학에서 저마다 다른 인생 공부를 하였다. 그것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다. 좌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이 시련과 실패와 좌절을 견디고 이겨냈다. 그리하여 모난 인격은 부드럽게 깊어지고 삶의 지혜는 익어갔다. 연륜은 경륜이 되고 이제는 이 땅의 어른세대로 자리매김했다. 성공한 자의 과거는 비참할수록 아름답고, 성장의 진통은 괴로울수록 빛난다. 친구들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죽마고우 고향 친구들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친구들의 인생은 진주를 잉태하는 진통이었다.
2020.4.5. 둔주
베토벤의 로망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