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1. 도시 탈출
시골집 장독대의
오래 묵은 장맛 같은 동무랑
5월의 신록향 맡으러
회색빛 도시를 탈출했다
움직이는 음악 감상실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들 때
장사익의 찔레꽃
두견의 피 울음 같이 구슬프고
녹음방초 우거진 길섶에는
청아한 찔레꽃
새하얗게 피어있었다.
2. 비빔밥
햇살 밝은 산기슭에 자리한
궁궐 같은 벽오동식당에서
나와 춘행은 보리밥이 지겹다며
흰쌀밥을 시켜서 비벼먹고
규모와 점자는 보리밥이 그립다며
꽁보리밥을 시켜서 비며 먹었다
비빔밥에는
보릿고개 추억도 비벼져 있었다
"밥이 하늘이다"
*수운의 말씀이다
조선의 가난한 백성에게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님은
이스라엘 민중의 예수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 왕은 그의 목을 잘라 죽였다
다시 음악 감상실에 올라
느린 속도로 산모롱이 돌아서
수만리를 지날 때
무등산 줄기 흘러내린 골짜기에
모내기 마친 다랑논은 황토물만 고요했다
승용차의 창을 내리자
5월의 비릿한 풀내음 밀려들었다
그리고
실안개처럼 스며오는 그윽한 향내음
아!
찔레꽃 향기였다.
3. 천년은행나무
화순 이서의 천년은행나무는
안녕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의 신령한 당산나무이다
종유석처럼 아래로 자란 돌기가
건장한 사내의 거시기를 닮아
아들을 소원하는 여인들이
밤이면 몰래 치성드린 전설의 나무이다
나라에서 길이 보호하려고 지정한
천연기념물 303호이다
만약,
만약에
저 천년은행나무에
딸을 점지한다는 신비한 기운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종유석 같은 돌기를 두 손으로 비비며
간절히 빌 것이다
딸 하나 낳게 해달라고.
4. 물염정
적벽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자리에
그림 같은 정자 한 채 지어 놓고
물들지 말고 학처럼 고고하라며
*물염정이라 이름 지은 양반선비
폐족의 멍에 때문에
부귀영화에 물들지 못한 울분을
부귀영화에 물든 양반선비 조롱하는
침보다 날카로운 풍자 시로 승화시켜
백성의 막힌 숨을 뚫어준 *삿갓시인
양반선비의 물염정과
삿갓시인 난고의 석상이
모순되게 어울리는 언덕배기에
이팝꽃은 누렇게 시들어 가는데
하얀 찔레꽃 소담스레 피어있었다.
*물염정은 화순군 이서면에 있으며
'물염'은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뜻
삿갓시인은 방랑시인 난고 김병연으로
화순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5. 충효동
집으로 오는 길에
규모 언니가 커피 사겠다고 우긴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은
영화처럼 우아하게
낭만을 마시는 게 아니라
묵은 장맛처럼 깊게 우러나는
정을 마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충효동 들머리의
작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충효동은 *충효열 3 정려각이 있고
가사문학의 산실인 환벽당, 식영정 등
스토리텔링이 넘치는 역사의 땅이다
따스한 아메리카노 마시며
나는 충효동 유적을 설명하려 했으나
동무들은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수다 떠느라 정신이 없다
그랬다
동무들에게 유적 해설은
삶에 보탬이 안 되는 죽은 화석일 뿐이고
수다는
기쁨, 슬픔, 회한을 풀어내는
드라마보다 리얼한 인생 고백이었다
수다 떠는 여자 친구들의
주름진 얼굴이
가시덤불 헤치고 피어난
찔레꽃을 닮았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형제의 충과 효, 그리고 왜군의 능욕을 피해 자결한 김덕령 부인의 열을 기리라고 정조 임금이 충효 마을이라 이름 짓고, 마을 앞에 충. 효. 열을 뜻하는 삼 정려각을 세웠다.
-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