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댁 꽈리


외할머니댁 꽈리
일기 쓰기는 나의 팔십 인생에 스며든 일상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고요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 자신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삶의 관조이다. 일기를 쓰다 보면 외롭고 슬플 때는 스스로 위로함을 받게 된다. 기쁜 일로 부푼 마음 들뜬 흥분은 일기를 쓰면서 차분해져 스스로 겸손해진다. 고독할 때 자신을 성찰하며 쓴 일기는 철학적 사유이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이다.
나는 이렇게 써온 일기를 꼭꼭 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가, 나이 팔십이 넘어서야 뒤늦게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그 방법을 모르고,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하던 차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랑하는 후배의 권유로 문단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신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게도 되었다.
이제는 비밀처럼 숨겨온 일기 속의 사연들을 하나하나 세상에 드러내서, 영화 같은 내 삶의 추억을 공감받고 싶기도 하고, 나만의 고유한 삶에 축복의 메시지를 받고도 싶다. 아래의 글은 19년 전 2003년의 일기이다. 늦었지만 비로소 세상에 내보인다.
🐞 2003년 9월 22일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르른 가을날
광주선명학교에 갔다. 진ㅇㅇ 교장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학교는 교문에서부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정서적으로 안정된 분위기였다. 교정에 들어서니 불타듯 붉은 샐비어와 가녀린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꽃밭 그늘에, 와!~ 치자 빛깔의 예쁜 꽈리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꽈리는 가짓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원산지이다. 마을의 빈터나, 산비탈, 풀밭 등에서도 잘 자란다. 꽃은 6~7월에 하얗게 핀다. 꽃이 지고 나면 꽃받침이 달걀모양으로 되어 열매를 완전히 둘러싼다. 열매는 점점 커 가면서 빨갛게 익기 시작한다. 열매는 포도알처럼 똥그란 모양으로 예쁘다. 빨갛게 익은 꽈리를 따서 씨앗을 빼버리고 입에 넣고 불면 ‘뽀드득’ 예쁜 개구리 소리가 난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좋아한다. 시골 초가집 장독대 옆이나 울 밑에 심었다가, 가을 되어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골목은 꽈리를 불며 노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노리개가 귀하던 시절 꽈리는 아이들의 중요한 놀잇감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잘 볼 수가 없다. 요즘 아이들이 꽈리를 잘 모르는 이유이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꽈리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옛날 외할머니댁에서 꽈리를 불고 놀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져들었다.
🍒 아홉 살 추석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댁에 갔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외할머니댁은 순천시 조곡동 둑실마을의 제일 부잣집이었다. 마을은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나 외할머니댁은 높고 긴 담으로 둘러싸인 큰 기와집이었다. 사랑채가 있는 대문을 지나서 외할머니가 계시는 안채로 가기 위해 중문을 여니 외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시는 동안 나는 뒤란으로 나갔다. 뒤란의 담 밑에는 꽈리가 지천(至賤)으로 열려있었다. 빨갛게 익은 꽈리가 줄기에 줄줄이, 주렁주렁, 대롱대롱, 수없이 매달려 있었다. 그 꽈리를 한 개 따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하는 아줌마에게 하나 따 달라고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나오신 외할머니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우리 손주 딸, 꽈리 따줄까.” 하시면서 구슬보다 동그란 꽈리를 한 움큼 따 주시는 것이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가난한 소녀가 억울하게 죽었단다. 얼마 후 소녀가 묻힌 자리에 싹이 트더니 무럭무럭 자라 구슬보다 동그란 열매를 맺었단다. 그것이 이 꽈리란다.” 할머니는 꽈리의 슬픈 전설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씨앗을 뺀 꽈리를 입에 넣고 올공거리니 ‘뽀드득’ 소리가 났다. 나도 외할머니께 배워, 금방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꽈리 소리는 전설 속 소녀의 노래라고 상상하며 불기도 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 꽈리는 여자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리개였다. 교실에서 공부시간에 꽈리를 불다가 선생님께 야단맞은 아이도 있었다.🍒
“언니, 여기서 뭐 해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진ㅇㅇ 교장 선생님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감상에 젖었기에 사람 오는 것도 모르고 그리 서 계세요?”
교장실 창문으로 나를 본 진 교장은 꽃밭에서 한참을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다가 궁금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꽈리를 보니 어렸을 때의 추억이 떠올라서……”
“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 올봄에 일부로 모종을 구해와 심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며 교장실로 향했다. 주고받는 정겨운 대화가 아지랑이처럼 가을 하늘로 피어올랐다
감상곡은 가을의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