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나는 이글을 한라산 오른 지 10년째 되는 2019년 1월 6일 비로소 쓴다.
2009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부부모임에서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1월 7일, 나는 부부모임의 관광 일정에서 벗어나 홀로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새벽 7시 숙소에서 택시 타고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택시비 3,000원. 버스정류소서 성판악까지 버스표 사 버스에 올랐다 버스비는 1,500원. 성판악 08시에 도착했다. 아이젠을 샀다. 8,000원. 배낭에는 빵과 우유 그리고 생수 한 병이다.
성판악, 안개 자욱해 지척분간이 어려운 하얀 눈 세상이다. 짙은 안개와 쌓인 흰 눈은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빨아들인다. 고요한 꿈의 세계이다.
벌써 등산객들로 붐비지만, 표정들이 엄숙한 순례자들 같다.
온통 하얀 눈 세상에 안개 자욱한 한라산 성판악의 웅숭깊은 분위기 탓이다.
어제 제주 관광 때는 눈도 없고 날씨 또한 맑았다. 때문에 눈 쌓인 한라산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홀로 산에 온다는 것이 일행에게 미안해 포기할까 주저했으나 역시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흐뭇하다.
8시 10분 드디어 한라산으로 들어간다.
바람 한 점 없는 숲은 온통 눈과 안개 몽환의 세상이다. 발길로 다져진 하얀 눈길을 따라 등산객의 줄 길게 이어졌다. 앞사람만 보면서 간다.
우람한 상록수와 낙엽수 가지에는 상고대 피었고, 키 낮은 잡목과 산죽에는 하얀 눈이 솜이불처럼 두껍게 덮여있다. 사람들은 묵묵히 걷는다. 누가 감히 이곳에서 세속의 소리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는가. 엄숙하다. 말은 잃고 숙연해질 뿐이다. 가파르지 않은 길, 평지를 걷듯 눈길을 간다. 순례자의 행렬처럼.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했다. 신비의 세계는 진달래 대피소에 이르니 끝났다.
안개는 사라지고 파란 하늘에 밝은 햇살 비춘다. 비로소 왁자지껄 대화와 탄성이 얼음처럼 맑은 공기에 파문을 일으킨다. 소리는 파란 하늘로 퍼져 사라진다. 대피소 휴게실은 사람들로 붐빈다. 라면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라면은 직접 먹는 맛보다 오히려 먹는 모습이 더 맛있게 보여 먹고 싶은 음식이다. 후루룩 소리에 자극적인 냄새가 라면의 멋이다. 라면의 유혹을 떨치고 대피소를 떠난다.
진달래대피소 지나니 길은 가파르고 바람도 거칠다. 순례자의 행렬처럼 이어진 등산객 줄은 진달래대피소에서 끊어지고 나 홀로 백록담을 향해 오른다. 파란 하늘아래 뻥 뚫린 시야가 가슴까지 뻥 뚫리게 한다. 밝은 햇살 받은 녹색 숲과 하얀 눈의 조화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이다. 어제 시내 관광 때는 거친 바람에 추웠으나, 가픈 숨 몰아쉬며 오르는 산길에서는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난다. 무릎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하늘에 까마귀들 난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까마귀이다.
드디어 감격의 백록담에 도착했다. 11시 10분이다.
해발 1950m,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감격의 첫발을 디뎠다.
쨍하고 깨질 것 같은 맑고 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하얀 사슴은 없고 하얀 눈만 햇살을 튕기는 백록담이 발아래 아스라하다. 시야는 툭 터졌다. 몸도 마음도 시원하다. 마음껏 심호흡 한다. 바람은 서 있기 힘들게 세차다. 하늘은 가깝고 속세는 멀다. 여기가 하얀 사슴의 나라 한라산 정상이다. 정상은 넓지 않고 올라오는 등산객은 점점 많아진다. 오래 있을 수 없다.
정상이란 잠시 머무는 곳, 잠시 스치는 곳일 뿐이다. 삶의 뿌리는 저 세속에 있다. 나는 정상을 떠나 사람 사는 낮은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곳 정상에 불과 10분 머물기 위해 새벽 7시부터 서둘러 숙소를 나서 홀로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록담 내려 보이는 한라산 정상에서의 10분은 무심한 십년의 세월과 맞먹는 의미의 시간일 수도 있다. 평생 다시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쉽게 오를 수 없는 한라산이기 때문이다.
나는2009년 1월 7일 오전 11시 10분 한라산 정상에 두 발로 서 있었다.
11시 20분 관음사 쪽으로 하산 길 정하고 출발한다. 내려가는 길은 햇살 밝은 백설의 세상이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려간다. 눈이 많이 쌓여있어 넘어져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다. 뒤따라오는 여자들의 감탄사 맑게 들린다. 중년의 여인들이다. 인천에서 온 산악회원들이란다. 인천에서 배로 제주까지 왔단다. (훗날 진도 앞바다서 침몰한 세월호였을까?)
1700m 고지부터 다시 안개가 깔려있다. 하늘은 안 보이고 원시림처럼 우거진 숲길에 안개만 자욱하다. 인천 여인들과도 떨어져 홀로 안개 자욱한 원시림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온다. 관음사 가까워지면서 쌓인 눈은 적어지고 흙길이 시작된다. 몽환의 세계 다녀온 듯, 꿈에서 깨어난 귀는 멍하고 정신 또한 몽롱하다. 뒤돌아 한라산 바라보지만 희끗희끗 눈 쌓인 숲, 원시림뿐이다.
관음사 13시 40분 도착. 총 5시간 30분 걸린 산행이었다.
걸어서 3.5km 걸으니 버스정류소 있다. 휴게소 매점은 산에서 내려온 등산객들로 붐빈다. 김 모락모락 오르는 오댕국의 은은한 내음, 먹고 싶지만 자리가 좁다. 버스 온다. 버스에 오른다. 시청 앞에서 내려 택시로 숙소까지 온다. 부인에게 전화한다. 일행들과 아직도 관광 중이란다. 말 타고 사진 찍고, 여기저기 재미있단다. 나는 용수해수탕으로 가 심신을 해수탕에 담그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한라산 눈 쌓인 몽환의 세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택시기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라산은 겨울 눈 쌓일 때와 5월 철쭉 필 때가 좋습니다.”
“그 때 다시 한 번 오십시오.”
철쭉 필 때 또 오리라 다짐하면서 피로를 씻는다.
후기
택시기사의 말대로 철쭉 피는 5월 다시 한라산을 찾았다.
2009년 5월 23일 산악회를 따라서 녹동에서 제주행 배를 탔다.
선상에서 노대통령 서거 뉴스를 접했다. 2009년 5월 23일 12시뉴스다.
다음 날 5월 24일 한라산 올랐다. 산악회회원들과 어울려 올랐다.
한라산 오르는 내내 마음은 어둡고, 철쭉의 전설만 새삼 슬펐다.
※ 수첩의 여행메모를 참고로 2019년 1월 6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