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시대惡童時代
1. 꽂감 1961년 소년의 나이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일 때이다. 단풍은 이미 졌지만 첫눈은 아직 이른 을씨년스러운 어느 날 오후,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비웠다. 아이들은 해방을 맞은 듯 천방지축 날뛰었다. 소년은 친구들 몇 명과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를 하였다. 한참 신나게 공을 차고 있는데, 한 아이가 뛰어오더니 “야, 꽂감이 빨리 교실로 들어오라고 해야.”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긴장으로 굳어졌다. 아이들은 교감선생님을 꽂감이라 불렀다. 호랑이도 무서워 벌벌 떠는 꽂감이라 부를 만큼 교감은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무서운 교감을 꽂감으로 비틀어 부름으로써 오히려 희화의 대상으로 즐길 만큼 아이들은 재치 있고 익살스런 악동들이었다. 소년과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겁먹은 모습으로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자, 호랑이 얼굴로 교단에 꼿꼿이 서서 아이들을 노려보던 꽃감이 “자리에 앉지 말고 뒤로 가서 서.”라고 명령했다. 아이들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교실 뒤로 가 엉거주춤 섰다. 꽂감의 차가운 명령이 이어졌다. “둘씩 마주보고 서”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마주 보고 섰다. “서로 뺨을 한 차례 씩 때려.”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꽂감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소년은 마주 본 친구의 뺨을 왼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친구도 소년의 왼쪽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소년과 친구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더 세게 때려” 꽂감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친구는 소년의 뺨을 가만히 때렸다. 소년도 친구의 뺨을 가만히 때렸다. 꽂감의 명령은 이이지고 소년과 친구는 점점 세게 서로의 뺨을 때려갔다. “철석”, “철석”, 아이들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뺨을 때리는 손바닥의 힘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뺨은 붉게 부어올랐다.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뺨을 주고받는 친구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키득키득 소리 죽여 웃다가, 어느새 웃음기는 사라지고 무거운 공포의 분위기로 젖어들어 갔다. 꽂감은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뺨을 주고받는 동안 정겨운 친구에서 증오의 적이 되어버린 아이들을 자리에 가 앉으라고 명령했다. 천하의 개구쟁이들을 단숨에 장악해버린 꽂감은 겁먹어 쥐죽은 듯 조용한 아이들에게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링컨 대통령은 느그 나이 때 가난해서 학교도 다지지 못한 것 알고 있냐?” 교실의 아이들은 침묵했다. 꽂감의 열변은 계속 되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변호사를 했어.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훌륭한 변호사였다고 오~~” 꽂감은 링컨이 변호사로 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일화의 내용은 이렇다. -변호사 사무실로 어느 날 허름한 차림의 나이든 여인이 링컨을 찾아왔다. 여인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앞뒤 맥락 없이 애걸하듯 말했다. “변호사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시오. 우리 아들은 죄가 없으라우.” “어머니, 우선 자리에 앉으시고요. 차분하게 말씀해 보세요.” 링컨은 여인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말하라 했다. 자리에 앉은 여인이 긴 한숨 토하며 말한 내용은, 아들이 살인죄로 수감 중이고 곧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링컨은 어머니에게 재판일 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큰 걱정 마시라 위로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찾아보고, 교도소를 방문해 수감 중인 여인의 아들 스티븐을 면회했다. 스티븐은 링컨에게 사건 당일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 스티븐은 친구들과 모월 모일 밤 해변 백사장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고 했다. 밤은 깊어가고 술에 만취한 스티븐은 모랫바닥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고 했다. 찬이슬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마이클이 죽어있었고, 자신이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살인범으로 체포된 근거는 목격자 닉슨의 증언 때문이라고 했다. 닉슨이 소나무 숲으로 가 소변을 보는데 갑자기 심하게 다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스티븐이 칼로 마이클의 가슴을 찔렀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술에 취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일이 돌아오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의 피의자 심문이 있었다. 피고인 스티븐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검사가 요청한 증인의 증언이 끝났다. 유죄가 확실해 보였다. 변호사 링컨이 재판장 앞에 섰다. 링컨은 증인 닉슨에게 물었다. “증인, 사건이 일어난 시각이 대강 새벽 2시쯤이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네” “살인사건 현장과 증인이 목격한 소나무 숲은 20m가 넘는데, 어떻게 범인이 스티븐이라고 단 정할 수 있죠?” “달밤이라 확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증인 심문을 마친 링컨은 재판관 앞으로 나가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은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건 당일은 음력 초사흘입니다. 음력 초사흘은 초저녁에 서쪽하늘에 눈썹 같은 달이 잠깐 떴다가 금방 지고 맙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각 새벽 2시쯤에는 하늘에 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달빛에 스티븐의 살인 장면을 봤다는 것은 위증입니다. 깜깜한 밤에 소나무 숲에서 20m 떨어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증인은 마이클을 죽이고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던 스티븐에게 살인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재판장이 증인 닉슨을 심문했다. 증인 닉슨은 오열하며 자백했다. 마이클과 닉슨은 사소한 일로 다투다 그만 닉슨이 마이클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술에 취한 우발적 사고였다. 겁이 난 닉슨이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모두 모랫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닉슨은 홀어머니랑 사는 스티븐이 만만하게 보였다. 닉슨은 스티븐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죄를 은폐했던 것이다. 재판 결과 닉슨은 살인죄로 구속되고 스티븐은 무죄로 풀려났다.- “이놈들아 박수 쳐.” 꽃감의 버럭 소리에 아이들은 우레같이 손바닥을 쳐댔다. 아이들은 어느새 잔잔한 감동의 얼굴로 꽂감의 열변에 빠져들었다. 소년은 친구를 보았다. 친구는 웃고 있었다. 에필로그 이듬해 3월 꽂감은 발령이 나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된다. 소년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우울했다. 순이도 전학을 가기 때문이다. 순이는 꽃감의 딸이다. 순이는 한동안 전학을 가지 않다가 나중에야 아빠 학교로 전학을 갔다. 소년에게 순이는 황순원 소나기의 윤 초시네 손녀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