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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추모합니다

gureum 둔주 2021. 11. 8. 14:41

부모님을 추모합니다

부모님은 1952년 해남읍에서 둔주포 아랫마을 한전 관사로 이사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35세, 어머님은 32세 젊은 나이였습니다. 큰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 큰형님은 2학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집에서 덕님, 덕희, 정희, 도연을 낳으시어 슬하에 구 남매를 두셨습니다. 구 남매가 새끼 제비처럼 한 이불 덮고 살았던 그 집은 정남향이었습니다. 집 앞의 작은 바다는 만조 땐 마당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거렸습니다. 호수 같은 바다였습니다. 바닷물 빠져나가면 듬성듬성 갈대밭이 있는 갯벌 사이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른바 풍천이 흘렀습니다. 큰누나는 이 집에서 살 때 결혼하였습니다.

1962년 봄, 부모님은 윗마을로 이사했습니다. 마을에서 떨어진 산 아래 집이었습니다. 해가 늦게 뜨는 서향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봄에는 복사꽃 피고, 여름이면 산새들이 둥지를 틀며, 가을에는 초롱불 매단 듯 붉은 감 주렁주렁한 집, 그리고 겨울에는 눈 속에 붉은 동백 피어나는 집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이 집에서 겨우 5년을 사시고, 1967년 3월 21일(음력 2월 11일)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풀잎의 이슬보다 허망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로서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을 어머니에게 모두 떠안기고 가셨습니다. 두 형은 군대에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에서 고통스러워하시던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아버님의 그 고통은 어린 자식들 두고 차마 죽을 수 없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죽음의 길을 편히 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 해결하지 못한 한을 안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 한을 풀어주신 이는 오직 어머님이셨습니다. 아버님이 떠넘긴 무거운 인생의 짐을 모두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어머님의 그 막막한 심정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어머님을 이해할 거 같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님 없는 어머니의 치열한 삶이 뼈를 저리게 합니다. 어머님이 없었다면 오늘의 팔 남매는 결단코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보내시고 삼십 년을 더 사시다가 1997년 9월 8일(음력 8월 7일) 무거운 인생의 짐 모두 해결하시고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합니다. 편히 누워계신 어머님의 얼굴은 아기 같았습니다. 아버님의 인생 짐까지 다 감당하신 어머님은 "다 이루었노라" 하시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습니다.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상상합니다. 아버님은 어머님에게 미안하다고 할 거 같습니다. 고맙다고 할 거 같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원망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가지를 긁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2024년은 아버님이 가신 지 57년째, 어머님이 가신 지 27년째 되는 해입니다.
우리 구 남매는 모두 아버님이 사신 세월보다 많은 세상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루어놓으신 삶의 터를 떠나 저마다 다른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모님의 음덕입니다. 하여 구 남매는 비록 서로 떨어져 살아도 부모님을 추모할 때는 둥지 안의 새끼 제비가 됩니다.

구 남매의 머리에 저장된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한 기억들이 서로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진 추억들도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큰 은혜에 대한 고마운 마음, 효도하지 못한 후회, 그리고 부모님의 명복을 빌며 추모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이 똑같을 것입니다.

저희 구 남매도 머잖아 부모님이 계신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시길 빕니다.
2024. 2. 11.  다섯째 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