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친구 경희
1959년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교사 발령장을 받았을 때, 나는 꽃다운 나이 열아홉이었습니다. 2000년에 명예퇴직하였으니 교단에 몸담은 세월 40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의 가난한 후진국에서 세계가 기적이라고 놀랄 정도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경제적 발전에 비례하여 열악했던 교육환경도 눈부시게 좋아졌습니다. 나는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발전적으로 변화해온 교육환경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그 힘들었던 시절을 추억해봅니다. 그리운 친구 경희를 추억합니다.
나는 1948년에 순천동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시절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고, 경제적으로는 몹시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가까이 온다고 했지만, 나라는 악랄한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뿐, 조국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국토는 허리가 잘렸고, 남과 북은 이념이 다른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정치적 혼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가난이었습니다. 가을에 거둔 식량이 겨울을 넘기기 전에 떨어져, 보리가 나올 때까지 굶주리며 살아야 했던 가난한 삶을 보릿고개라 불렀던 것입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궁핍했지만, 나는 가난을 모르고 행복하였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신 아버지의 큰딸이고,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 외갓집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는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특히 예뻐하셨습니다.
평화롭던 학교생활은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여수 순천 지역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호응한 지역의 좌익세력이 봉기하여 동부 6개 군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반란군은 진압되었으나, 많은 사람이 죽고 경찰서가 불타는 등 피해가 컸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제주 4·3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14연대 군인들을 제주로 파병하려고 하자, 14연대 군인들은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 없다며 파병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반란입니다. 제주 4·3 사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 도민들의 반발로 시작된 사건으로 수많은 제주 도민들이 희생된 비극입니다.
얼마후 다시 문을 연 학교는 우울했습니다. 아버지가 경찰서로 끌려간 친구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학생도 있었습니다. 내 짝꿍 경희 아버지는 산으로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경찰들이 경희 아버지를 잡으려고 날마다 경희 집을 찾아와 경희 어머니를 겁박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참 좋아했던 친구, 내 짝꿍 경희는 나와 동갑이었습니다. 경희는 단정하고 예쁘고 착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힘들어도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학교는 우울했던 그 시절 나는 친한 친구 경희가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때 나는 3학년이었습니다. 북한 군인이 따발총을 들고 왔습니다.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총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경희 아버지도 돌아왔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습니다.
학교에 갔을 때 불탄 교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절반 정도만 학교에 나왔습니다. 학교가 어수선했습니다.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난도 가야 했고, 폭격기가 날아오면 숨어야 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교과서를 압축해서 배우고 가정학습으로 끝낼 때도 있었습니다. 글쓰기 숙제는 엄마를 졸라서 해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꽃과 자연에 대한 글을 써 주셨습니다.
경희 아버지는 인민위원회의 높은 감투를 썼다고 했습니다.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다녔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안 사실인데, 지주인 외할아버지도 경희 아버지가 힘을 써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불안하고 힘들 때, 내 친구 경희는 즐거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경희는 아버지를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아버지께 배웠다며 부용산 노래도 곧잘 불렀습니다.
‘부용산’은 벌교 출신 박기동 시인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기리며 쓴 시를 나주 출신 작곡가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박기동 시인과 안성현 작곡가는 목포항도여중 교사로 함께 재직했습니다. 안성현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제자가 결핵으로 죽어 상심이 컸는데, 마침 여동생을 잃고 슬픔이 큰 박기동의 시를 보고 곡을 붙인 것입니다. 노래는 항도여중 학예발표회 때 합창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금방 목포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빨치산들이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금지곡이 된 노래였습니다. ‘부용산 산허리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 너만 가고 말았구나.’ 참 슬픈 노랫말입니다. 총을 든 무서운 빨치산들이 왜 그리 슬프고 서정적인 노래를 불렀는지 몰랐습니다. 빨치산이 산에서 죽어갈 때 마지막 한마디는 ‘어·머·니’, 아! 이해가 될 듯합니다.
어느 날 북한군들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이 퇴각한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아버지도 부산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그러나 경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수군수군 소리를 듣고 알았습니다. 산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따라 가족들 모두 갔다고 했습니다. 경희가 사라진 후 나는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 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 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넘어 하늘만 바라봅니다.
5학년 때 즐겨 불렀던 ‘고향 하늘’ 노랫말입니다. 박종국 담임 선생님은 학교를 찾은 손님과 선생님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내 노래를 자랑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외할머니 앞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청이 크고 고운 게 꼭 니 엄마 닮았다야”
외할머니는 칭찬하셨지만, 나는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경희를 그리워하며 불렀습니다. 그렇게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저물어갔습니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흘렀습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어린 시절의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습니다. 그러나 1963년 지리산에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토벌군의 총을 맞고 체포된 사건으로, 나는 새삼스레 친구 경희를 그리는 아픔을 앓아야 했습니다. 열여섯 어린 색시 정순덕, 그녀는 신랑을 찾아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남편을 따라 빨치산이 되었습니다. 남편도 죽고 동료도 죽고…, 다 죽어갈 때 그녀는 끝까지 살아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간 친구 경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산에 묻히었는지, 북으로 올라갔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친구 경희를 추억하며 안녕을 빌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