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적 이익이 인간적 존엄을 압도할 때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디스토피아의 특색은 무정함이다. 타자의 고통은 주목되지 않고, 약자들의 신음은 경청되지 않는다. 욕망에 취한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은 불편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의 역사를 공감의 확대 과정이라 말했다.
그 말이 딱히 그른 것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주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인지적 공감도, 타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고통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함께 아파하는 정서적 공감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정한 마음이 공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은 냉혹하게 변한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불안이 스멀스멀 우리 영혼을 잠식할 때 진정한 안식은 불가능해진다.
적대적 공간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소명이다.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 세상을 뒤덮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 어딘가에는 아름다움의 공간을 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라는 시에서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고 노래했다. 물결 위를 가볍게 날아오르는 흰나비처럼 사는 이들이 있다. 세상의 어둠과 절망의 깊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희망이 더 근원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