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꾼 시인, 정초부 길
정초부. 1714년에 태어나 1789년에 죽었다. ‘초부(樵夫)’는 이름이 아니다. ‘나무꾼’이란 뜻이다. 대대로 노비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나무를 해서 져다가 파는 나무꾼 일을 했다. 본디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름이 ‘봉(鳳)’이라는 얘기도 있고, ‘이재(彛載)’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생전에 그는 한사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정초부라 불리기를 원했던 건 신분제에 대한 비판도, 저항의 뜻도 아니었다. 노비도, 나무꾼도 그는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나무꾼의 숙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그는 시인이었다. 천민 출신이란 자신의 자리에 발을 딱 붙이고 살면서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가슴 뭉클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서정적 묘사로 그려내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처연하다.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해도 그 뒤에 서려 있는 왠지 쓸쓸하고 슬픈 정서가 묻어난다. 궁핍하고 초라한 삶을 드러낼 때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해서 오히려 통곡하는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더 푸르러(東湖春水碧於藍)/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白鳥分明見兩三)/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柔櫓一聲飛去盡)/ 노을 아래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夕陽山色滿空潭)” -정초부의 시 ‘동호범주(東湖泛舟)’
시에 등장하는 ‘동호(東湖)’를 두고 지금의 옥수동 주변 동호대교 부근의 한강이라는 설이 있고, 여주 신륵사에서 바라본 여강(지금의 남한강)이란 얘기도 있다. 거기가 어디든 무슨 상관일까. 짤막한 칠언절구의 이 시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시각적 묘사뿐만 아니라 노 젓는 소리를 꺼내 청각적 이미지까지 끌어들였다. 시가 묘사로, 혹은 소리로 그려내고 있는 건 충만한 봄날의 정경이다.
정초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는 지금까지도 ‘18세기 최고의 서정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를 나무꾼이 지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반 사회에서 일대 화제가 됐고, 정초부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는 강을 건너는 배를 그린 산수화의 그림제목(畵題)으로 이 시를 가져다 썼을 정도였다.
나무꾼을 숙명이라 여겼던 시인
그는 시인이었지만, 평생 일관되게 자신을 시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가 알려지면서 명성이 높아져 여러 시모임에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모임은 거의 없었다. 마지못해 가는 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모임을 계기로 양반 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하거나 교분을 이용한 특권을 모색했을 법한데, 그런 행적이 전혀 없다. 그는 평생 나무꾼 일을 놓지 않았다. 대대로 노비였던 그는 땔나무 파는 일을 숙명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의 시가 유독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는 이유다.
“글로 쌓은 명성 늙어서도 나무하니(翰墨聲名老採樵)/ 두 어깨에 가을빛 쓸쓸하네(兩肩秋色動蕭蕭)/ 산바람 장안길로 불러 들면(山風吹入長安路)/ 새벽녘에 동성 제2교에 이를 테지(曉到東城第二橋)” -정초부의 시 ‘땔나무를 팔다(販樵)’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나무꾼 일을 했다. 그는 양평과 가평 일대에서 나무를 해다가 물길로 한양까지 운반해 동대문 일대에서 팔았다. 피곤하고 지친 삶이었으리라. 시 속에서는 이른 새벽에 나무를 팔기 위해 다리 위에 선 늙은 그가 걸어 나오는 듯하다. 그의 가난이 체념처럼 묻어나는 쓸쓸한 시도 있다.
“산새는 옛날부터 산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마는(山禽舊識山人面)/ 관아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郡藉今無野老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라(一粒難分太倉粟)/ 강가 다락에 홀로 올라 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江樓獨倚暮烟生)” -정초부의 시 ‘환곡을 구걸하며(乞조)’
그는 끼니를 잇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관아에 가서 쌀을 꾸려고 하는데 호적 대장에 이름이 없다. 쌀을 꾸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시를 썼다. 정자에 앉아 술잔을 앞에 놓고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의 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부류의 시다.
그의 시에서 곤궁함이 드러나는 구절이 여럿이다. ‘낙엽 위에 쌀을 꾸는 편지를 자주 쓴다(黃葉頻題乞米書)’는 구절은 좀 직설적인 편. ‘아침 세끼 곡기를 끊은 건 신선이 되고자 함은 아닐세(三朝피穀未成仙)’라고 쓴 문장도 있다. 끼니를 이을 곡식이 없어 굶으면서 ‘신선이 되기 위해 굶는 게 아니다’라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썼다. 날을 벼린 칼날처럼 문장을 휘두르지 않고, 현실의 가난과 고통마저 이처럼 완곡하다.
정초부를 묻고 오는 길에 쓴 시
그렇다면 노비였던 그는 어떻게 글을 깨치고 시를 쓰게 됐을까. 정초부는 지금의 양평 땅인 남한강을 끼고 있는 양근현의 명문가인 함양 여씨 가문의 노비였다. 함양 여씨 가문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여성제의 집안으로, 조선 후기 양근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가였다.
정초부는 함양 여씨 가문의 후손 여춘영의 소유였다. 여씨 집안에서는 한시를 곧잘 짓는 범상찮은 재주를 가진 정초부를 문중의 자제와 함께 교육시켰다. 특히 정초부보다 스무 살 아래였던 여춘영은 그를 단순한 하인으로 부리지 않고,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교감했다.
여춘영은 정초부를 노비에서 해방시켜 줬는가 하면, 정초부의 시를 앞장서 주위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나뭇짐을 하던 한낱 미천한 신분의 나무꾼 시인이 초부라는 이름으로 시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여춘영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여춘영의 시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를 기리며 남긴 글이 있다.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 여춘영은 노비를 재산이나 가축쯤으로 여겼던 시대에 정초부를 스승과 친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정초부의 시적 완성은, 여춘영과의 이해와 교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여춘영은 정초부가 일흔여섯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기리는 열두 편의 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절창은 여춘영이 정초부를 묻고서 돌아오는 길에 쓴 시다. 시에는 정초부의 불우한 일생과 죽음을 애달파하는 진심이 묻어난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黃로亦樵否)/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霜葉雨空汀)/ 삼한 땅에 명문 가문 많으니(三韓多氏族)/ 다음 세상에서는 그런 집에 나시오(來世托寧馨)” -여춘영의 시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읊다’
여씨 집안의 노비에서 풀려난 정초부는 월계나루 근처 월계마을에 초막을 짓고 살아서 ‘월계초부’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여기 살면서 부용산 기슭에서 나무를 해서 동대문 밖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정초부를 기리는 ‘정초부 지겟길’은 바로 이 일대의 산길과 마을길을 이어 만든 것이다.
정초부는 여러 편의 시를 썼지만 제 이름으로 시집 한 편 남기지 않았다. 전하는 시들은 모두 다른 선비들이 자신의 문집에다 베껴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