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토론 등 다양한 행사와 학술 대회가 있었다. 또한, 동학을 재조명하는 여러 저술이 출간되었다. 그중 김민환 교수님이 쓴 장편 역사 소설 ‘등대’가 눈길을 끈다.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였던 김민환(80) 작가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점이니, 이제는 사회과학, 인문과학, 사회운동도 우리 것을 만들어야 한다며, 동학이 그 바탕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소설 등대를 썼다고 한다. 퇴직 후 보길도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김 작가는 소안도가 부산 동래, 함경남도 북청과 함께 3대 항일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것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 외딴섬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을까’라는 그의 궁금증은 마침내 소안도 출신 동학군이 주도한 등대 습격 사건을 다룬 소설로 완성된 것이다. 김 작가는 수운 탄신 200주년이 되는 해, 동학농민운동 기념일이 있는 5월에 맞춰 소안도 이야기를 써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주인 된 나, 주인 된 백성, 주인 된 민족’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사회를 개벽하겠다는 정신이 한국에서 나타났다가 없어져 버렸다면서, 이쯤에서 주인 된 내가 되는 길을 서양 이데올로기를 떠나 한 번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2024. 05. 28 인터넷 기사 캡처)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고 존경하는 양우 형님의 해양고등학교 동창이신 김 작가의 저서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를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보성 일림산 기슭에 있는 소설의 주인공 정해룡 선생의 생가 ‘거북정’을 답사한 다음, 독후감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인연으로 김 작가님은 친필 사인을 담은 저서를 저에게 선물하셨지. 그 고마운 감격을 잊을 수 없어, 서둘러 소설 ‘등대’를 구하고, 무더운 여름을 독서 삼매경으로 이겨냈다.
소설 ‘등대’는 조선이 일본의 침략 야망 앞에서 가망 없이 무너져가는 암울한 시기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남쪽 바다 외딴 섬 소안도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배경으로 한다. 소안도는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한 독립운동유공자만 22명인 그야말로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호사가들은 풍수지리적으로 조선의 혈맥이 해남 땅끝 사자봉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 밑으로 이어져 마지막 솟아오른 곳이 소안군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안도에는 수석 애호가들이 최고로 꼽는 묵석이 많고, 주민들의 저항 기질이 강하여 항일투쟁도 열렬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등대가 세워진 섬 이름에 대한 전설도 흥미롭다.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이 이 섬의 왼쪽을 치고 비껴가기 때문에 소안도에는 피해가 적다고 하여 섬사람들은 이 섬을 ‘좌지도’라고 부른다. 일본 사람들은 소안도 맹선항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고 하여 ‘항문도’라고 부르고, 까마득한 옛날 그 섬에서 중국까지 다스릴 인물이 태어날까 두려워 당나라 도인이 혈맥을 잘라 절을 세웠다고 하여 당사도라고도 부른다. 섬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인터넷 지도에는 당사도로 표기되어있다. 유감스럽다.
그 당시 소안도에는 유난히 서당이 많았다. ‘소안도에는 식솔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온 입도조가 여러분 계시는데, 나라의 죄를 지고 도망치거나 난을 피해 들어온 것이 아니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들어왔다. 그러기 때문에 후손들이 섬에 살지라도 도리를 알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서당을 세웠다.’ 소설의 중심인물 서범규 훈장의 설명이다. 백제 왕족의 후손인 서 훈장도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 참전한 서종구 할아버지가 고향 논산을 떠나 소안도의 맹선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서범규 훈장은 소설의 주인공 서진하의 아버지이다.
서범규 훈장은 새로운 지식의 갈망이 강해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는다. 그는 책을 읽고 습득한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시대정신에 맞는 가치관을 세우는 진보적 지식인이다. 그가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소안도로 숨어들어 온 나성대 동학 접장에게서 책 네 권을 선물 받는다. 수운 최제우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과 동학 경전의 핵심인 ‘포덕문’, ‘동학론’, ‘수덕문’이다. 서 훈장은 이 책들을 읽고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은 것만 같다. 그는 동학 경전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나라가 나라답게 굴러가는 개벽의 대도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서 훈장은 서당에서 제자들에게 동학 경전을 강론한다.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급할 때 보국안민의 계책을 세워야 해. 보국의 보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서 돕는다는 뜻이여. 동학은 수양의 덕목에 그치는 것이 아니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뜯어고치는 보국이 동학의 바른 정신이여.” 서 훈장이 ‘포덕문’ 강론 중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서학은 하느님이 주인이고 나는 종이여. 하느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해. 유도는 군주가 주인이고 나는 신하여, 군주가 명령하면 신하는 복종해야 해. 그런디 동학에서 주인은 바로 ‘나’여. 수운은 나를 중심에 놓는 새로운 도를 내놨어. 참말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도를 만든 것이여.” 서 훈장이 ‘동학론’ 강론 중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서 훈장은 동학을 가르친다는 홍 영감의 고자질로 끌려가 곤욕을 치른다.
정월 대보름이면 처녀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유둣날이면 청년들이 바다로 나가 전통적 고기잡이 개매기를 하는 등 섬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도 을사늑약으로 패망해가는 나라의 어두운 기운이 밀려온다. 혼란의 시국에 소안도의 삼현이라고 불리는 서 훈장과 신 훈장 그리고 스승인 김 훈장이 만나, 망해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다투는 사상 논쟁은 소설 등대의 백미다. 성리학에 충실하고 소중화론의 허망한 명분에 갇힌 김 훈장이 불온서적을 가르친다고 제자 서 훈장을 책망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중화의 도는 한계에 이르렀으니 동학 같은 우리의 도가 필요한 시기라는 신 훈장과 서 훈장의 주장에 김 훈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리는 깨어지나, 이후 세 차례 더 만나 논쟁하면서 결국 김 훈장도 완고한 아집에서 벗어나 두 제자와 뜻을 같이한다. 그리고 김 훈장은 소안도의 유지들을 모아놓고 일제 침략에 맞설 강령을 제시한다. 김 훈장은 소안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군자였다.
소안도 청년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몸으로 실천하니, 그 중심에는 이준화와 서진하가 있다. 동학도 이준화와 서 훈장 아들 서진하는 뜻이 통하고, 이름도 비슷하여 형제처럼 지낸다. 준화는 머잖아 아이를 갖게 되는 유부남이고, 서진하는 20대 청년이다.
진하와 일본인 미유키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진하는 갈등한다. 미유키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미유키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한복을 손수 지어 입고 우리말을 일본어보다 잘한다. 아버지를 졸라 남동생을 서 훈장의 서당에서 공부하게 한다. 진하에게 물옷을 지어주고, 진하 어머니께 드릴 전복을 잡아준다. 진하의 몸은 미유키를 갈망하지만, 진하의 의식은 미유키를 밀어낸다. 그러한 진하가 미유키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좌지도 등대를 건축하는 일본인 기사가 미유키 집을 드나들면서부터이다. 미유키 아버지도 일본인 기사를 맘에 두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진하는 미유키를 붙들고 사랑을 고백한다. 미유키는 기다렸다는 듯 진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미유키가 좌지도에 세워지는 등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진하의 무지를 일깨운다. 부산, 여수, 제주 등지에서 목포, 군산, 인천 쪽으로 가는 일본 군함의 길을 밝히고, 군산, 목포에서 곡식을 싣고 일본으로 가는 화물선의 길을 밝히기 위해 등대를 세우는 것이라는 미유키를 설명을 듣고 진하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다. 똑똑한 미유키 앞에서 논어 중용을 공부했다는 자신의 무지가 부끄럽고 일본의 야욕에 분노했다. 진하는 결심한다. 등대를 부수기로.
이준화는 부인이 출산하다 후유증으로 아이와 같이 죽자 한때 시름의 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보성 안규홍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으로 일본 병사와 전투를 벌이기도 하는 등 적극적 항일투쟁을 한다. 육지에서 항일투쟁을 하는 것보다 고향 소안도로 가서 투쟁하는 것이 가치 있겠다는 판단에 소안도로 돌아온다.
잠시 좌지도에 사는 친구의 미역 거두는 일을 도우러 갔다가, 우연히 좌지도 등대 건축 공사 노동을 하고 돈을 벌기도 한다. 다시 소안도로 돌아와 진하를 만난다. 준화는 일본이 조선 침탈을 위해 세운 등대 건축에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책하고 분노한다.
서진하와 이준화는 등대를 부수기로 결의한다.
진하는 등대를 부수러 가기 전 미유키를 만난다. 미유키는 등대를 부수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격려한다. 깊은 밤 대장 준화의 지시에 따라 일곱 명의 대원들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등대를 습격한다. 등대를 깨고 발전기에 불을 질렀지만, 직원들에게 발각되어 총격전이 벌어진다. 준화도 진하도 총을 맞고 쓰러진다. 또 다른 한 명도 총을 맞는다. 날이 밝자 목포에서 진압군이 출동한다. 총상을 입은 준화와 한 명의 대원은 끌려가 총살당한다. 서진하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안도 사람들이 좌지도 앞바다를 뒤지지만 서진하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하가 죽었으리라 단정한다. 미유키가 몇 날을 슬피 울었다는 소문이 돈다. 어느 날 미유키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사라진다. 미유키 아버지는 절을 돌아다니며 딸을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미유키 아버지가 서진하의 부모님을 찾아가 미유키의 편지를 보여준다. 미유키 아버지와 서진하 부모님은 미유키의 물옷에 서진하의 물옷을 포개어 바다에 띄우고 불태운다.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다. 이후로도 미유키 아버지는 전국의 절을 누비며 딸을 찾지만 허사다.
몇 년이 흘렀다, 미유키 아버지가 아들과 일본으로 돌아간다. 서 훈장 가족도 소안도를 떠난다. 떠나는 서 훈장에게 김 훈장이 10년 뒤에는 꼭 돌아오라고 말한다. 10년 뒤에는 왜놈이 나갈 것이라면서, 만약 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들고일어나 쫓아내자고 한다. 그러나 10년 후의 역사는 김 훈장의 바람대로 일본은 물러가지 않았고 섬사람들은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또, 몇 년의 세월 흘렀다. 진도의 외진 섬 곽도, 젊은 남녀가 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한다. 진하와 미유키다. 그날 밤 총상을 입은 진하는 해남 이진에서 온 선배의 도움으로 살아, 이곳 곽도로 오고 선배의 도움으로 절에 있는 미유키를 찾아 데려온 것이다. 뒤늦게 미유키 아버지와 진하의 부모도 알게 되고, 미유키를 만난 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서 훈장 부부는 아들이 있는 곽도로 온 것이다.
섬 집에는 서 훈장 부부가 아장아장 손주를 본다. 진하와 미유키는 5년 뒤에는 소안도로 돌아가자고 다짐한다.
총살당한 이준화와 살아남은 서진하, 그들은 일제 침략의 길을 밝히는 등대를 부수고, 항일투쟁의 불을 밝히는 등대가 되었다. 준화는 죽어 등대가 되었고, 진하는 살아 5년 후 소안도 3·1운동의 등대가 될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화려한 문학적 수사에 빠져 줄거리 이해가 안 되는 예도 있는데, 소설 등대는 일상의 언어와 간결한 문장으로 쓰여있어 읽기에 편하고, 줄거리가 머리에 쏙 정리된다. 등대가 상징하는 이미지도 쉬이 그려지고 흥미진진하다. 작가가 사실을 적시한 기사 작성에 익숙한 미디어학과 교수님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서 훈장의 강론을 통해 동학 경전의 포덕문과 동학론의 중심 사상을 설명하지만, 최제우의 행적에 관해서는 쓰지 않았다.
-수운이 경상도 경주에서 포덕문을 쓰고 도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따른다. 유림이 수운을 서학쟁이로 몰아 모함하고 관에서는 체포령을 내린다. 수운은 따르는 이들을 위해 한글로 ‘안심가’를 쓰고, 전라도 구례 남원 쪽으로 피신한다. 수운은 이곳에서 힘없는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은거하면서 한글로 ‘교훈가’, '권학가’를 쓴다. 아녀자 등 힘없는 백성들이 쉬이 읽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은적암에서 ‘동학론’을 쓴다. 동학이라 한 까닭은 서학쟁이가 아님을 밝히기 위한 것도 있고, 우리의 고유한 사상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동학은 경상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사상의 완성은 전라도였다. 동학의 깃발 아래 일어난 보국안민 운동도 전라였다. 전라도가 없었으면 동학도 없었다.- 도올 김용옥의 말이다.
작가가 수운의 행적을 생략한 이유는 ‘전라도에 편향되었다는 오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랬더래도 소설 등대는 전라도, 완도, 소안도 사람들에게 강력한 자긍심을 심어줄 것이다. 김민환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2024. 8. 1 둔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