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반야봉 일출
1.
호기심 가득한 소년은
그을음 낀 유리 조각으로 해를 보았다.
동그란 모양의 빨강 해는 예뻤다.
소년은 도화지에 빨강 해를 그리고
검정 크레용으로 까맣게 덧칠한 다음
칼등으로 긁어서 빨강 해가 드러나게 했다.
2.
소년은 어른이 되어
지리산 철쭉 흐드러질 즈음
반야봉 일출을 보기 위해
사진동호회 회원들을 따라나섰다.
자정 무렵
성삼재 주차장에서 내려
노고단을 지나 새벽녘 반야봉에 올랐다.
어른 된 소년은 새벽의 찬 공기 피해
하얀 꽃잎 처연한 철쭉꽃나무 밑에 앉아
일출의 감동을 기대하며
선배와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웠다.
드디어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는데
지리산의 능선들 겹겹이 이어진
검은 실루엣 너머의 동쪽 먼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 기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잿빛 하늘을 한참 주시하니
빨강 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잿빛 하늘을 긁어내는 것 같았다.
어른 된 소년은
그 옛날 소년이 그리 했듯이
반야봉 신령님이 노고단 여신을 위해
잿빛 하늘을 긁어 빨강 해 드내고 있다는
감성적인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동그란 모습 드러낸 빨강 해
눈부신 빛을 내뿜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은 잿빛을 벗지 못했다.
잿빛 하늘의 빨강 해, 그것은
소년이 그을음 낀 유리로 보았던
예쁘고 빨강 해, 바로 그 해였다.
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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