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들녘에 서서
유난히 길었던 장마
물 폭탄처럼 쏟아진 폭우로
휩쓸리고 무너진 삶의 터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대급 태풍까지 연거푸 몰아쳐
그러잖아도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지난여름은 고난 그 자체였다
가을이다
지난여름의 그 엄청난 자연재해
언제 있었냐는 듯, 가을의 들녘은
황금물결 출렁이는 풍요로운 충만
시인 릴케는 가을 앞에서
위대한 신의 섭리를 노래하였는데
나는 이 가을 들녘에 서서
지난여름의 홍수에 몸서리치며
자연의 신령을 신앙한 옛사람 따라
가을의 충만한 자비에 고개 숙이고
마음 경건히 옷깃을 여민다.
아, 이 두렵고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에필로그-
황금들에 서 있는 늙은 농부
황금들에 쏟아지는 가을 햇살
농부는 하늘과 동업하는 성직자
이 시를
고향의 농부 친구에게 바친다.
2020. 10. 13 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