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몸으로 종을 쳐서 은혜를 갚은 까치의 전설을 접한 이래 치악산은 일찍이 머리에 각인된 산이다. 군대와 친구 등 원주에 관계된 일도 무시로 있어서 자주 기억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조금 우울한 느낌으로 치악산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연이 있다. 오래전 회사 야유회를 치악산으로 간 적이 있었다. 산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었던 터라 어느 중턱에서 그냥 발길을 돌려 닭백숙집으로 직행하고 말았던 것. 까마득히 잊은 줄 알았는데 특히 강원도 쪽으로 산행할 때마다 그 못난 행각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내 삶이 너덜너덜하다면 바로 이런 사실들이 모여서 그렇게 되는 것.
여러 곡절 끝의 어느 날 오후 두 시. 치악산의 황골을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는 안간힘을 다해 받쳐주는 내 그림자뿐이고 앞으로는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낭창한 가지를 튕기고 오는 바람들처럼 정상을 짚고 오는 그때 내 나이쯤의 활달한 청춘들이 몹시 부러웠다. 입석사를 지나면서부터 길이 회초리처럼 가팔랐다. 쥐너미재에서 시간을 보니 좀 빠듯할 것 같았다. 스산한 가을 햇살은 벌써 흰 머리카락처럼 축축 처지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 종 두 개를 엎어놓은 듯한 돌탑이 우뚝한 비로봉에 겨우 도착했다. 그날 이후 내 아무리 복잡한 마음의 회로를 따라 지금에 이르렀다 해도 치악은 늘 제자리에 있었다. 여느 산의 꼭대기와는 사뭇 다른 이 기분과 이 기운. 끊어졌던 길 하나를 잇고 나니 스무 살의 하루가 철커덕 오늘과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세 바퀴 탑돌이하고 내려가는 길. 산국과 이고들빼기가 단풍의 모자란 산색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저녁 어스름. 멀리 나무들이 점점 짐승의 웅크린 자세를 갖춰가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익어가는 열매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짐승들, 하늘이 보낸 눈이 아닐까.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마음의 얼룩 하나를 지운 느낌으로 이제 나는 퍽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고 말해볼까. 어둠의 지퍼를 차례로 닫으며 내려와 골프를 끝낸 친구들이 기다리는 두부집으로 향했다
귀족은 혈통으로 가계와 가문을 이루지만 민중의 가족은 언제나 ‘땅의 가족’이며 ‘동물 가족’이다. 숲의 가족들과 맺은 공유지의 협약은 지금도 산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주는 것 이상으로 가져와선 안 된다. 산에서 욕심을 내다간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증여의 규칙을 어기면 다음 해에 먹고살 것을 얻지 못한다. 다친 짐승은 도와주어라, 그러면 그가 반드시 너를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