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출, 그 장엄한 서사의 추억
1. 아침노을
소년은
벼 이삭 여물어 갈 무렵
참새떼 쫓으라는 부모의 성화에
동트기 전 일어나 논으로 갔다. 그러나
참새는 보지 않고
잿빛 하늘 붉게 물들어가는
서기산 산마루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년은
산마루 위로 떠 오른 붉은 해
이글이글 눈이 부실 때까지
두 눈 가느스름히 취한 듯 바라보다
마침내 노을빛 하늘 환해지고
아침 햇살에 이슬방울 반짝이면
학교에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서기산은 소년의 고향마을 산
둔주
2. 무등산 해맞이
1989년 12월 31일, 밤 깊어질 때
도청 앞 광장에 모인 광주시민들
5‧18의 한을 제야의 굿판으로 신명 나게 풀고
새해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에 품기 위해
진눈깨비 날리는 어둠을 뚫고 무등산으로 향했다.
손전등 불빛 이어진 산길을 따라
중머리, 장불재를 지나 도착한 입석대는
매서운 추위에 흰 눈 얇게 깔려있었다.
해맞이 시민들
별빛도 구름에 가린 동쪽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떠오르는 태양 맞을 준비로 엄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지는 여명의 빛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름 가득한 잿빛 하늘은
노을로 물들지 않았고, 끝내
떠오르는 태양은 볼 수 없었다.
새해 첫날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왔다.
둔주
3. 낙산사 일출
적막한 사위(四圍)
검은 바다는
파도도 잠들어 잔잔한데
별빛 총총한 하늘은
시리게 고요했다.
나는
늦은 오월의
새벽 한기를 피해
몸을 움츠리고
어둠에 묻힌 수평선을 주시했다.
드디어
수평선 위로 붉은빛 띠는가 싶더니
잿빛 하늘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자궁막 찢고 탄생하는 어린 생명 같이
피보다 붉은 해 수평선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 순간
홍해 바다 갈라져 모세의 길 열리듯
해와 나 사이에, 빛나는 황금빛 물결이
빛의 다리인 듯 눈부시게 이어졌다.
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해님을 가슴에 품는
환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경이로운 감격을 표현할
언어를 알지 못해 침묵했다.
둔주
4. 대청봉 일출
밤새 전국에서 모여든 등산객들
오색 등산로 문 열리자
다투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앞사람의 뒤꽁무니만 따라 오르는
캄캄한 숲 가파른 산길은
첫눈 내려 미끄러웠고
어두운 골짜기는 무서웠다.
가쁜 숨 몰아쉬며 오른 대청봉은
거센 바람 휘몰아쳐 몸 가누기도 힘든데
일출 보려는 등산객들로 붐비었다.
천지는 새벽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뭉게뭉게 먹구름 무겁게 하늘을 가려
노을 볼 수 없었고, 태양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삼대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데…
지난 삶 반성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와! 먹구름 사이로
이글거리는 태양, 눈부시게 빛나면서
강렬한 태양 빛 쏟아져 내렸다.
옛사람이 두려움에 떨며 신앙했던
태양신의 위용이 저리 장엄했을까?
다메섹 가는 길, 사울 눈멀게 한
하늘나라 진노의 빛이 저리 눈부셨을까?
경외감으로 숙연한데
여기저기 터지는 탄성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인간의 감탄사는 소음이었다.
에필로그
오를 때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아름다운 설악의 속살들
경탄의 눈으로 감상하며
미끄러운 눈길 조심조심 내려왔다.
단풍과 첫눈이 어울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산
어느새 구름은 걷히고
해는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양지바른 골짜기 돌무더기 사이사이
비눗방울 모양의 얼음이 햇볕에 반짝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투명한 얼음 막이 풀의 줄기를
우주인의 헬멧처럼 두르고 있었다.
이 신비로운 현상은
지난밤의 추위에 풀의 줄기 터지면서
아직 줄기에 남아있는 물기가 얼어
신비로운 얼음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한번 터진 줄기, 더는 얼음꽃 피우지 못한다.
한낮이 지나서야 내려온 산 아래
단풍 불타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둔주
5. 반야봉 일출
호기심 가득한 소년은
그을음 낀 유리 조각으로 해를 보았다.
동그란 모양의 빨강 해는 예뻤다.
소년은 빨강 해를 그린 도화지에
검정 크레용으로 까맣게 덧칠한 다음
칼등으로 긁어서 빨강 해 드러나게 했다.
소년은 어른 되어
지리산 철쭉 흐드러질 즈음
반야봉 일출을 보기 위해
사진동호회 회원들을 따라나섰다.
자정 무렵
성삼재 주차장에서 내려
노고단을 지나 새벽녘 반야봉에 올랐다.
어른 된 소년은 새벽의 찬 공기 피해
하얀 꽃잎 처연한 철쭉꽃나무 밑에 앉아
일출의 감동을 기대하며
선배와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웠다.
드디어 어둠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는데
지리산의 능선들 겹겹이 이어진
검은 실루엣 너머의 동쪽 먼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 기미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잿빛 하늘을 한참 주시하니
빨강 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잿빛 하늘을 긁어내는 것 같았다.
어른 된 소년은
그 옛날 소년이 그리 했듯이
반야봉 신령님이 노고단 여신을 위해
잿빛 하늘을 긁어 빨강 해 드내고 있다는
감성적인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동그란 모습 드러낸 빨강 해
눈부신 빛을 내뿜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은 잿빛을 벗지 못했다.
잿빛 하늘의 빨강 해, 그것은
소년이 그을음 낀 유리로 보았던
예쁘고 빨강 해, 바로 그 해였다.
2020. 7 둔주
※사진은 화해 이일승 님 작품
본문과는 관련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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